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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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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동아구할매집 김삼연 대표

‘마산의 맛’ 아구찜 세계화 꿈꾸는 ‘아구명인’

  • 기사입력 : 2011-03-2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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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연 오동동아구할매집 대표가 아구찜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아구를 들고 있는 김 대표와 며느리 한유선씨.


    50년 전 배고팠던 어린 여식이 고향을 떴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던 당찼던 열다섯 소녀는 마산 총각을 만나 결혼을 했고 시어머니와 함께 아구찜 식당을 열어 46년간 장사를 하면서 아구요리 명인이 되고 아구를 세계에 알리는 ‘아구할매’가 됐다. 봄내음이 묻어나는 즈음에 사람의 향기를 찾아 나선 곳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아구거리의 ‘오동동아구할매집’ 김삼연(65·여) 대표이다.

    김 대표는 1966년께 시어머니 안소락선 여사와 함께 당시 ‘오동동초가할매집’을 개업했다. 1960년대 중반 마산에서 갯장어 장사를 하던 혹부리 할머니가 어부들이 가져온 아구(아귀의 사투리)에 된장과 고추장, 마늘, 콩나물, 파 등을 섞어 찜을 맨 먼저 내놓은 뒤 1~2년 차이로 ‘오동동 진짜 초가집’, ‘구강할매아구찜집’ 등과 함께 문을 연 것.

    김 대표는 마산 명물 아구찜의 원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산 아구찜을 전국에 널리 알린 주인공이다.

    김 대표가 아구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의령에서 태어나 돈을 벌기 위해 마산으로 온 뒤 마산 총각을 만나 지금의 ‘오동동아구할매집’이 있는 초가집으로 시집을 오면서부터. 김 대표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당시 아구찜 집이 서너 곳 정도 있었는데 시어머니한테도 조리법을 배우고 이웃집에서도 배웠습니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음식 만드는 것이 서툴다 보니 시어머니 구박에 몇 번이나 도망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의 매서운 타박이 지금 흔들리지 않고 사업을 키워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잠깐 회상에 잠겼다.



    “아구찜은 70~80년대 여공들의 한이 서려 있는 음식”

    김 대표의 식당은 1970년 조성된 마산수출자유지역(현 마산자유무역지역)과 한일합섬, 무학소주 등과 함께 성장을 했다.

    당시 여공들은 아구찜을 먹기 위해 푼돈을 모아 한 접시를 시키고는 5명이 넘게 한 식탁에 앉기도 했다. 김 대표는 동생들 공부를 시키기 위해 배를 곯아 가며 가발공장에서 일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몰래 콩나물과 반찬, 밥을 올려놓기도 했다. 한 접시를 5~6명이 앉아서 먹는 것도 부끄러운데 주인이 밥과 반찬까지 더 주자 어떤 여공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지금은 그 손님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식당을 다시 찾고 있단다.

    김 대표의 아구집은 마산 특유의 마른 아구찜 일변도로 나가는 이웃 가게들과는 달리 손님들이 편하게 아구를 먹을 수 있도록 생아구찜과 아구수육 등을 개발해 차별화를 시도하면서부터 점차 입소문을 탔다.

    ‘오동동아구할매집’에 손님들이 몰리자 김 대표는 마산 명물 아구찜을 전국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돈은 못 벌어도 명함이라도 뿌리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던 것.

    첫 무대는 1981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문화축제 ‘국풍 81’. 이때부터 김 대표는 식당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아구요리 재료를 머리에 이고 전국 야시장이며 큰 행사장을 찾아 부스를 만들고 아구찜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마산 아구찜은 경상도 특유의 화끈한 맛에 기름기가 없어 소화가 잘되는 데다 열량이 낮고 비타민A가 풍부한 점이 알려지면서 당시 충무김밥과 춘천 막국수 등 전국의 향토음식과 함께 전국의 식도락가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김 대표는 이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1993년 대전엑스포 때, 팔도명산물전에 홍보 부스를 개설해 아구찜과 아구불고기전골 등을 선보였다. 입심 좋고 얼굴(?) 되는 김 대표에게 방송사 PD들이 주목하기 시작했고 방송을 타면서 일본 NHK와 아리랑TV 등을 통해 외국에도 소개됐다.

    그녀는 아구요리 응용을 위해 일본 와세다대 식품학과에서 아구요리 과정을 거쳤고 1998년에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식품·외식산업 최고경영자과정(4기)도 수료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아구명인이다.



    “마산 아구요리 국민 먹거리로 정착시켜야지요”

    김 대표는 아구찜 브랜드와 조리법을 만들어 식당은 물론 급식과 군납도 하는 외식산업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아구는 모두 자연산으로 독이 없으며 칼슘이 많고 식감도 좋지만 손질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단점. 이를 위해 김 대표는 덕장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아구거리에 공장을 유치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김 대표는 마산명물 요리 아구찜을 상품화하기 위해 지난 2009년 이주영 국회의원, 이태일·임경숙 도의원, 권재도 목사 등과 함께 마산아구데이(5월 9일)행사를 만들었다. 아구할매상 시상과 아구특강, 축하공연, 시식회 등에 사재 수천만원을 들였다.

    김 대표는 2009년 3월에는 업주 10여 명과 지역 인사들과 함께 서울 청계천에서 ‘마산 아구찜’ 시식회를 갖고 ‘한양 사람’들에게 합포만의 매콤한 맛을 선보이기도 했다.

    ‘오동동아구할매집’은 창업 1대 안소락선씨와 아구찜 전국화에 앞장선 2대 김 대표에 이어 3대 한유선(43) 며느리가 마산 아구찜 산업화에 가세했다. 한씨는 탁구실업팀 선수 출신으로 지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가업을 잇기 위해 직접 아구 손질부터 조리까지 맡고 있다.

    김 대표는 한씨가 성격도 좋고 탁구 선수 출신이라 팔힘도 좋아 아구찜 주걱을 쓰는 데 제격일 것 같아 스카우트했다고 우스개로 얘기한다.

    아구수육

    아구불고기
     
    “아구골목 활성화에 도와 시가 나서야 합니다.”

    김 대표는 업주들이 아구골목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지만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공동 브랜드 개발을 위한 국비지원은 물론 홍보를 위해 고속도로와 큰 대로변에 ‘아구찜’ 상징물도 필요하다는 것.

    김 대표의 아구찜 인생은 봉사활동과 궤를 같이한다.

    부모를 일찍 여읜 김 대표는 40년 전부터 걸인·넝마주이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했으며, 지금도 몸이 불편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또 경남 최초 여성봉사클럽인 백합로타리클럽을 창설했으며, 23년 전 소해 봉사상을 제정해 시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난 1995년 ‘광복 50주년 사할린 동포돕기’ 봉사활동에는 3000만원의 성금과 물품은 물론 동포들의 결혼식을 주선하고, 병수발을 하며 많은 눈물을 쏟았다. 수년 전부터는 김치 1000여 포기를 담가 장애인·독거노인·복지시설 등에 나눠주는 등 이익의 사회환원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만들었던 아구찜. 이젠 장사꾼이 아닌 장인으로 아구를 세계에 알리는 데 여생을 바치고 싶은 것이 김 대표의 소망.

    죽는 날 죽더라도 아구골목을 살려놓고 죽겠다는 ‘아구명인’에게서 구수하고 매콤고소하면서도 담백하고 향긋한 마산의 맛이 퍼져 나왔다.


    김삼연 대표가 ‘오동동아구할매집’의 46년 역사가 담긴 사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삼연 대표는= 1947년 의령에서 2남4녀의 셋째딸로 태어나 15살에 돈을 벌기 위해 마산으로 나와 공장을 다녔다. 낮에는 가발을 만들고 밤에는 공부를 하다 열아홉 되는 해에 여섯 살 연상의 심인섭(71)씨를 만나 이듬해 결혼, 2남1녀를 뒀다. 큰아들은 김해 한 고교에서 교사 겸 카누팀 감독으로 있고 둘째아들은 금융계에 근무하면서 아구김치 개발 등 산업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취미는 노래로 2009년 전국노래자랑 마산편에서 인기상을 받을 정도로 수준급. 1996년 한국전통문화보존회 ‘전통문화보존명인장’, 2007년 대한명인문화예술교류회장 ‘대한명인’ 칭호를 받았다.

    글= 김진호기자 kimjh@knnews.co.kr

    사진=전강용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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