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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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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대중화 선구자 엄정행 경희대 음대 명예교수

“오 내사랑 목련화야~”… 굵으면서 맑은 목소리가 반겼다

  • 기사입력 : 2011-04-1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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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가곡의 대중화를 이끈 테너 엄정행 경희대 명예교수가 고향인 양산에 설립한 성악연구소에서 후학 양성과 성악 대중화에 전념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양산을 향하는 길, 차창 밖 봄옷을 갈아입은 산과 들에 따사로운 햇살까지 졸음을 한껏 부추긴다.

    식곤증과 오후의 나른함이 몰려올 때쯤인 오후 2시 양산시청에 다다랐다. 근처 문화예술회관 옆 건물 2층에 ‘엄정행 성악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다.

    “어서 오세요. 멀리 오시느라 힘드셨죠.”

    ‘가곡 대중화의 선구자’인 테너 엄정행(68) 경희대 음대 명예교수가 굵으면서도 맑은 목소리로 반겼다.

    청아한 음색은 나이와 닮아 있다. 일흔을 바라보지만 너무나 정정하고 밝은 기운이 넘쳤다. 동안 외모는 더 눈길을 끌었다.


    # 성악과의 인연

    엄정행 교수의 고향은 양산이다. 양산의 한 고등학교 사택에 살던 그는 어려서부터 성악가를 꿈꾸지 않았다.

    사택 인근 백골부대에서 가끔 학교에서 취사를 했는데, 어느 날 실수로 아궁이에 휘발유를 붓다 옆에서 구경하던 꼬마 엄정행의 왼쪽 다리에 불이 붙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리와 발 모양이 일그러질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 다시 걷지 못할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운동을 열심히 해야 다리의 모든 근육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배구 선수를 하게 됐다.

    고등학교도 배구선수로 진학했고, 목표도 체육 대학 진학이었다. 그래서 경희대 체육학과를 지원했다. 그 시절 키 작은 선수도 활약하기 좋았던 9인제 배구였지만 대학 입학을 앞두고 갑자기 6인제로 바뀌었다. 체육학과에선 173㎝의 단신이었던 그에게 배구선수로는 자격미달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당연히 체육대 진학의 꿈도 그만큼 멀어졌다. 할 수 없이 운동을 그만두고 뒤늦게 준비해 경희대 음대에 진학했다.


    # 타고난 목소리, 성악에 몰두하다

    아버지가 음악 선생님이다 보니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많았다. 배구 선수로 활동하던 중학생 시절 서울대를 갓 졸업한 음악 선생님이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매일 아침 6시부터 그를 깨워서 노래 연습을 시켰다. 당시 진주 개천예술제에 참가해 대상을 탄 것도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희대 음대 진학 역시 이런 과정이 한몫했다. 우여곡절 끝에 음악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는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중·고 시절 목소리 좋고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운동선수로 보낸 탓에 성악에 필수적인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는 물론 영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그였다.

    음대 생활이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1학년 내내 여러 차례 ‘그만둘까’ 고민하다가 2학년 때 이탈리아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음악과 홍진표 교수(1979년 작고)를 만나면서 그의 마음도 바뀌었다. 홍 교수는 엄정행을 불러 노래 한 번 시켜보고서는 단박에 재능을 알아봤다. 그는 “그때부터 나의 진짜 음악인생이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닥치는 대로, 무섭게 공부했다.



    # 쉽지 않은 성악의 길

    뒤늦게 노래를 공부하다 보니 고생이 많았다. 같은 하숙집에 살던 외국어대 학생들에게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우면서 발음을 공부했다. 실력을 갈고닦으면서 전국 대학생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고, 졸업 땐 경희대 성악과 대표로 신문사 주최 신년음악회에 나갔다. 그렇게 졸업은 했건만 가수의 길은 험했다. 우선 당장 노래가 밥이 되지는 않았다. 대학원에 1년여 다니다가 생활이 되질 않자 세종문화회관 산하 음악단에 들어가 월급을 받으며 공부를 했다.

    그때 같은 단원으로 만난 서울 음대 성악과 출신 아내와 1968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하고 나니 책임은 더욱 막중해지고, 노래로는 살길이 없어 이것저것 해본 일도 많았다.

    신세계백화점에서 음악 서적과 악기 파는 장사를 했고. 아내와 함께 양장점과 커피숍도 운영했다. 그러던 중 1972년 어느 날 MBC FM에서 장일남 선생이 제작한 가곡을 우연히 들으면서 한동안 떠나 있던 성악 열정이 되살아났다. 그는 장 선생을 찾아가 다짜고짜 녹음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의가 가상해 보였던지 12곡을 녹음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레코드는 때마침 붐을 이루던 FM방송과 텔레비전 전파를 자주 타게 됐고, 전국적으로 엄정행이라는 이름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 가곡의 대중화와 후학 양성

    그는 우리 가곡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79년부터 10년 동안 맡은 MBC 라디오 아침 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는 많은 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는 총 3500회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대타를 기용하지 않고 진행한 놀라운 기록도 갖고 있다. 오늘날 그를 있게 해 준 ‘목련화’를 비롯해 ‘가고파’, ‘비목’, ‘못잊어’, ‘고향의 노래’ 등 숱한 명곡의 멜로디가 나이 든 세대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것도 이때 일이다.

    1976년 경희대 음대 교수가 된 그는 낮에 강의하고 밤엔 방송준비와 음악회 리허설로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방송을 통해 배경지식도 많이 쌓았다. 대학 강단을 통해 교육자의 역할도 부단히 노력했다. 주당 20시간에 이르는 강의를 소화하면서 제자들의 가정생활까지도 다 꿸 정도로 제자와 후배 사랑이 각별했다. 대학 강사급 애제자만 수십여 명에 이르는 그는 34년간의 음대 교편을 내려놨지만 고향인 양산에 내려와서도 여전히 엄정행 음악연구소 산하로 창단된 ‘연우여성합창단’을 지도하며 성악을 가르치고 있다.



    # 성악·가곡 많은 사랑받길

    엄 교수는 지역 여성들로 구성된 주부 합창단인 연우여성합창단뿐 아니라 역량 있는 음악도를 길러내기 위해 전국학생 성악콩쿠르대회도 8년째 추진하고 있다. 재능 있는 음악도에게는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새로운 인재를 많이 발굴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의 바람 때문이다.

    서울과 양산을 오가는 무리한 강행군 탓에 지난 2007년 갑작스런 뇌출혈을 앓았지만 그의 열정은 예전 그대로다. 혈압강하제를 먹고 꾸준히 관리해 건강은 회복됐고, 목소리도 전보다 좋아졌다고 전했다. 노래를 부르기에는 너무나 열악했지만 주민의 환호는 너무나 뜨거웠던 강원 태백과 도계에서의 공연을 잊지 못한다는 엄 교수는 우리 가곡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관과 함께 공연도 볼 수 있는 무대가 하루빨리 만들어지길 희망했다.

    아울러 예전보다 시들어가는 대중들의 가곡 사랑이 안타깝다며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후배 성악가들의 많은 노력과 함께 좋은 공연을 펼칠 수 있는 풍토도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악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엄정행 교수는= 1943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나 양산초와 양산중, 부산 동래고를 거쳐 경희대 음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8년 부산의 한 예식장에서 생애 첫 독창회를 연 후 같은 해 서울 명동국립극장 무대를 통해 성악가로 정식 데뷔했다.

    1976년부터 32년 동안 모교에서 후학을 길러내다가 지난 2008년 정년퇴직, 양산에 성악연구소를 설립해 후학 양성과 지역사회의 음악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주요 음반으로는 ‘데뷔 30돌 기념앨범-내 마음의 강물’, ‘한국가곡(10집)’, ‘이탈리아가곡(3집)’ 등이, 저서로는 ‘목련꽃 진 자리 휘파람새는 잠도 안 자고’, ‘예술가의 삶-목련화에 새긴 영혼’ 등이 있다.

    글=김정민기자 isguy@knnews.co.kr

    사진=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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