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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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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순 사회복지법인 거제애광원 원장

“오늘도 사랑 가득한 잔칫날이 되게 하소서”

  • 기사입력 : 2011-05-1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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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복지법인 거제도 애광원 김임순 원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이기심은 인생을 무거운 짐으로 변화시키지만, 이타심은 인생의 짐을 생명으로 변화시킨다.

    선하고 친절한 삶, 이타적인 삶을 살아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행복한 삶을 위한 첫걸음이다

    21세기 성인으로 추앙받는 ‘빈자(貧者)들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이다.

    거제도에 가면 한국의 마더 테레사를 만날 수 있다.

    150㎝가 채 안돼 보이는 작은 키와 따뜻한 눈빛이 닮았고, 버려지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지난 60년 동안 헌신해온 모습이 닮았다.



    거제도 동남쪽 장승포동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사회복지법인 거제도애광원의 김임순(86) 원장.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해방 이후에는 농촌운동가를 희망했던 김 원장이었지만, 6·25전쟁이 운명을 바꿔버렸다.

    결혼한 지 불과 4개월여 만에 뱃속 딸아이만 남겨두고 남편은 행방불명됐다. 1951년 우여곡절 끝에 시어머니와 재회, 젖먹이 딸과 함께 거제에서 힘든 피란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52년 어느 날 오늘의 김 원장을 있게 한 인연을 만났다.

    “이화여대 강사였던 사회부(현재 보건복지부 전신) 거제분실장을 교회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는 다짜고짜 저를 데리고 언덕바지에 있는 피란민 막사로 데려 갔어요.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한 움막의 가마니를 들치고 들어가 보니 탯줄도 아직 떨어지지 않은 일곱 갓난아이가 미군 담요에 싸여 누워 있었어요. 분실장이 ‘이 아이들을 돌봐줘야겠소’라고 말해 ‘몇시까지요?’라고 물었더니 ‘몇 시간이 무슨 이야기냐’며 꾸중만 하고 가버렸지요. 그날 밤 아기들은 배가 고파 울고, 저는 내게 맡겨진 상황이 두려워 울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 원장은 이때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대학까지 나온 제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합니까. 다른 일을 시키시면 더 잘하겠습니다’라며 밤새 울며 기도했지요. 지쳐 잠시 잠이 들었다 새벽 교회 종소리에 깨었는데 ‘네가 왜 걔들 수준으로 떨어지려고 하느냐. 그 아이들을 네 수준으로 올리면 되지 않느냐’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깜짝 놀라 ‘평생토록 이 아이들과 살겠습니다’라고 서원했죠. 그리고 이후로 한 번도 제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김 원장은 그해 직접 드럼통 철판으로 바닥을 깔고, 가마니로 바람을 가리고, 흙으로 벽을 쌓아 만든 5평 규모의 움막집을 짓고 ‘사랑과 빛의 정원’이란 뜻의 ‘애광영아원’을 운영했다. 설립 다음 해 대학 은사에게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며 미국 유학 제의를 받았지만, ‘공부보다 버려진 아이들이 더 소중하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설립 초기에는 혼란스런 전쟁 중이다 보니 주위의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김 원장은 딸에게 물렸던 젖을 뗀 뒤, 고아 7명에게 물리는 등 똑같은 사랑으로 키웠다. 차별은 물론,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별없이 키운 만큼 하나뿐인 딸 송우정(60·애광원 상임이사)씨조차 중학교 진학할 무렵에야 친엄마인 줄 알았다고 회고할 정도다.

    “제가 오랫동안 한복 치마를 입었어요. 손 잡아줘야 할 아이들이 많은데, 제 손은 두 개밖에 없잖아요. 일 하는데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여러 아이들이 제 손 대신 치마폭을 잡을 수 있도록 폭넓은 한복치마를 고집했지요.”



    김 원장은 전쟁 고아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1978년 영아보육시설을 지적장애인시설로 전환했다.

    “1970년대 초부터는 지적장애 아이들을 애광원 문 앞에 버리고 가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적지 않은 나이인데, 왜 더 큰 고생을 하려느냐’며 주위의 만류도 있었지만, 장애인을 위한 삶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애광원에는 지적장애와 중증장애를 겪고 있는 230명이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 중증장애인 요양시설인 ‘민들레집’을 지어 함께 생활하고, 이들에게 교육이 필요해 장애아동들의 특수교육을 담당하는 ‘애광학교’를 설립했다.

    또 직업재활시설인 ‘애빈’을 통해 제빵, 원예, 수예 등을 가르치고 제품도 생산해 이들의 자립을 훈련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보육사들의 뒷바라지를 벗어나 스스로 가정꾸미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성빈마을’을 지었고, 이 사회 한가운데에 살 수 있게 애광원 울타리 밖의 일반 아파트를 임대해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다.

    이 같은 시설이 가능했던 이유는 막사이사이상 상금 3만달러를 ‘애광학교’ 건립비로 모두 쏟아부은 것과 같은 무욕(無慾)정신, 고령에도 전국 어디든지, 또한 미국과 독일·일본 등을 몸소 오가며 모금활동을 했기 때문인 데도 모든 공을 타인에게 돌렸다.

    “오늘의 애광원이 있기까지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기업·주민 등 지역사회의 배려, 재정·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후원자, 천사의 마음을 닮은 직원들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특히 수십억원에 달하는 설계비를 한푼도 받지 않은 강병근 교수, 매번 공사비를 미리 받지 않고 건축 후 몇 년이 지나서도 쪼개어 주는 대로 받았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게 감사드립니다.”

    지적장애인시설 전환 후 달라진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 원장은 “비장애아를 키울 때는 제가 키우는 아이가 누구보다 건강하고,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 사회에 나가 좋은 위치에 있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지적장애 아들과 함께 있다 보니 그것이 다 헛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오히려 이 아이들에게서 순박한 사랑을 배우고 정직한 마음을 배웁니다.”



    이어 김 원장은 “그런데 방문자 중에는 비교적 좋은 시설을 보곤 ‘(나보다 못한) 장애인이 나보다 더 낫게 사네’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나와 모습이 다를 뿐이지, 결코 나보다 못한 게 아니잖아요. 이들은 모두가 천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천사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동등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배려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들을 돕는 게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중 건강한 사람들이 분담해야 할 의무이거든요. 건강한 사람들에게 건강세를 부과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만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김 원장의 60년째 아침 기도 제목은 ‘오늘도 잔칫날이 되게 하소서’이다.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잔칫집 주인처럼 시설 아이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대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다짐한다고 말한다.

    김 원장은 내년 6월 말이면 60년 만에 정년퇴임을 한다. 김 원장은 복지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시설장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런 재산이 없다. 그래서 퇴임 후에도 애광원을 떠나지 못하고, 방 하나를 빌려 계속 아이들과 함께할 계획이다. ‘천사의 동네에 악마의 청지기가 와서 일한다’고 끝내 겸손해 하는 김 원장.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 다했다 하신 날 침상에서 불러주십시오. 그때까지는 힘 닿는 대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김 원장이 요즘 매일 하는 기도 내용이라고 한다.

    제 자식 하나도 짐스러워 버리는 세태. 수백명의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기르고, 그것도 사람의 손길이 일일이 가야 하는 지적장애인을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인 데도 일일이 거두는 김 원장. 애광원 앞으로 넓게 뻗은 장승포의 맑고 푸른 바다를 닮아 향기로웠다.



    김임순 원장이 성인 지적장애인들의 직업재활시설인 애빈에서 섬유직조부 장애인들을 격려하며 활짝 웃고 있다.


    ☞ 김임순 원장은= 1925년 경북 상주시에서 출생, 1949년 이화여대 가정대학을 졸업한 후 50년 4월 결혼했다. 1951년 거제로 피란온 후, 다음 해인 1952년 전쟁고아인 갓난아기 7명을 떠맡으며 애광원의 전신이었던 애광영아원을 설립, 1958년 애광직업보도소, 1970년 애광기술학교와 애광탁아소(현 옥수어린이집)를 설립했다. 이후 1978년 영육아시설인 애광영아원을 지적장애인 복지시설로 전환해 현재까지 700여 명 아이들을 사회에 배출하고 있다.

    김 원장은 평생을 사회복지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지도부문)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1994년 제4회 호암상(사회봉사부문)과 국민훈장 석류장(1970년)·모란장(1997년), 경남을 빛낸 여성상(1998년) 등을 수상했다. 또 2007년 3월 제6회 유관순상을 수상했고, 2010년 개교 70주년을 맞은 한신대의 첫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글= 정오복기자 obokj@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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