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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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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1박2일을 보다- 윤봉한(시인)

  • 기사입력 : 2011-08-1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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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산도가 고향인 후배가 있다. 놀러 오란 말을 여러 번 했다. 아름답고 조용한 섬이라는 거다. 섬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삼일 푹 쉬다 가도 좋다고 했다. 사실 후배와 마지막 통화한 것은 10여 년 전 일이다. 오래 미루다가 드디어 마음먹었다. ‘부처님 오신 날’과 함께 금·토·일 3일의 이른바 황금연휴였다. 마산을 빠져 나가기도 전에 교통정체로 이미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후배에게 들었던 달콤한 꾐말과 오래전에 보았던 ‘서편제’에서의 아름다운 청산도 풍광을 떠올리며 참을 수 있었다.

    월정리의 철마가 되어 달리지 못하고 길게 늘어선 고속도로 위에서는 그래도 청산도에 도착하면 하루는 한적한 섬의 보리밭 흙길을 숨이 차도록 걸어보리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마음속의 행복한 상상은 완도에 도착하자마자 현실과 맞닥뜨렸다. 힘들게 도착한 완도항 선착장에는 노정에서보다 더 많아 보이는 차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당연히 청산도로 들어가는 그 날치 배편 예약도 이미 끝난 뒤였다.

    한편으로 차를 세워둔 긴 줄이 보였다. 무슨 줄일까 하는데, 지금 이 줄에 차를 세워 둬야 한단다. 그래야만 내일 아침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어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러자 돌아온 대답. “1박2일 안 봤어요? 청산도 이제 대박 났어요”였다. 1박2일을 아직 찾아보기 전이었다.

    21세기 무한파워 TV를 경시한 엄청난 저주를 온몸으로 절감해야 했다. 사실 오늘은, 과거 채근담이나 명심보감 같은 고전에서 얻었던 생활의 지혜를 TV나 연예인의 입을 통해 얻는 시대다. 책을 읽고 또 읽고 생각을 하고 또 해야 했던 과거 지식인과 철학자의 금언은 뒷방물림이 되었다. 길고 어려운 문장과 복잡한 지식과 교양들은 쉽고 간단하고 재미있고 물렁물렁하게 머리에 쏙쏙 들어가는 TV의 언어로 교체되었다. 지피지기, 그 후 프로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재난은 없어야 했다. 최소한 어느 곳을 피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했다.

    아무튼, 그날 결국 완도 철수를 결정했다. 어떻게든 청산도에 입도하려 러브호텔까지 뒤졌지만 완도에서는 숙소조차 마땅찮았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차라리 근처 절로 가자 했다. 가까운 해남 미황사로 차를 돌렸다. 해가 지며 짐승의 긴 등뼈 같은 달마산의 능선이 드러나고 길은 차츰 어둠 속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시골 절에 이렇게 오밤중에 찾아가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예전에 부도밭 구경을 겸해 가본 길이라 안 되면 돌아오지 하는 마음이었다.

    잘했다. 미황사에 가길 정말 잘했다. 절에는 근처 마을 사람들이 모여 그야말로 동네잔치가 열렸다. 절 마당 이곳저곳을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동네 꼬마들도 있었다. 절을 병풍처럼 둘러싼 달마산과 대웅전에 어울린 초파일 지등의 아름다움이 이미 알려져 있던 탓인지 원행을 온 전문가 풍모의 사진작가도 두엇 보였다. 행복하고 조용한 초파일 저녁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게 1박2일 덕분이었다. 물론 청산도에 갔으면 청산도에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겠지만 그랬더라면 미황사의 소박한 초파일 풍경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각자 저마다 생각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나도 1박2일의 나PD도 모를 괜찮은 장소를 몇 군데 알고 있다. 알고 찾는 사람이 아직은 많지 않은 그 장소를, 몇 월 며칠쯤에 가면 무슨 꽃이 피는지 따위의 하찮은 디테일까지 들어있는 머릿속 그 비밀의 수첩을, 며느리도 모른다는 비장의 소스처럼 당분간 나만의 즐거움으로 남겨둘 생각이다. 그리하여 TV 1박2일에서 크게 두 팔 벌려 “놀러오세요”하면, 미안하지만 슬쩍 그곳을 피해 나만의 명소를 조용히 찾아갈 것이다.

    윤봉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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