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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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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텔레비전 천국- 유희선(시인)

  • 기사입력 : 2011-08-2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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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인 중에 집안에 텔레비전이 없는 분이 있다. 어느새 육 년째라 한다. 입시를 앞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실행에 옮겨 보긴 하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텔레비전은 그저 바보상자나 오락 정도로 치부하기엔 너무 생활 깊숙이 침투돼 있다. IT강국에 걸맞게 디자인 면에서도 세련된 인테리어의 몫을 하고 있다. 여러모로 텔레비전에 관해선 추억도 많고 장단점도 많아 단순하게 말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 좁은 땅덩어리가 텔레비전 천국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딜 가나 텔레비전 세례다. 그것도 대부분 첨단 제품들이다.

    매년 여름이면 에어컨 절전은 강조하지만 일 년 내내 무심히 켜놓는 텔레비전 절전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무조건 그야말로 무조건으로 텔레비전을 켜놓고 보는 일이다. 문화적 혜택이 오히려 비문화적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은행, 병원, 고속버스나 열차 그 어느 곳도 텔레비전 홍수로부터 피해갈 수 없다.

    어느 종합병원에서 일이었다. 의자가 있는 곳이라면 거짓말처럼 텔레비전이 있었다. 아니 텔레비전 있는 곳에 의자가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거운 마음으로 중요한 검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시끌벅적 개그프로를 방영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시청하는 거 같고 누군가는 눈만 멀뚱 뜨고 있는 것 같았다. 늘 길들여진 상황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불평하거나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고요함이나 적막감을 더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택시를 탔을 땐 서부영화를 켜 놓은 운전기사도 있었다. 총소리가 택시 안에서 찢어질 듯 포효했었다. 고속버스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주변 어디서나 무차별적인 텔레비전 설치와 광고로 대중의 눈은 더 멀어가는 것이 아닐까. 텔레비전 의존도는 더 높아만 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중독돼 간다.

    우린 이미 텔레비전 천국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 천국에 텔레비전이 사라진 모습을 상상하긴 어렵다. 아마 금단현상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 텔레비전이 갑자기 죽었다. 가족들과 한창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어떤 징후도 없었건만 심장마비처럼 생을 마감했다. 늘 명령에 백 프로 복종했던 TV가 단 한 번 스스로 명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순간 집안 전체가 정전된 것 같았다. 가족은 뿔뿔이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텔레비전이 있던 벽은 퀭하게 뚫린 동굴 같았다. 며칠 무인도에 갇힌 듯 적막한 기운이 돌았다. 십수 년 함께하던 덩치 큰 물건이 문 밖으로 빠져나갈 때는 기분이 묘했다. 충직한 노예, 눈먼 이들의 안내견이며 외로운 이들의 반려동물로서 너무나 충성스럽게 그 역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공공장소에서의 무차별적인 TV 설치와 방영은 자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 가는 길, 환승하기 위해 내린 밀양역 기찻길 조그만 휴게 칸에도 첨단벽걸이 TV가 하루 종일 켜져 있다. 잠깐 머물고 가는 저 공간마저 텔레비전이 장악한다. 음료수 자판기나 널린 쓰레기통처럼 흔한 지나친 친절이 문화 복지일까. 공공장소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소음처럼 들린다면 그 사람은 마치 대중문화 부적응자거나 아주 까칠하고 유별난 사람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약자처럼 피하기 일쑤다. 주변에서 너무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일수록 한번쯤 질문거리로 생각해봐야 한다. 텔레비전 천국에서 바로 이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생명력 있게 공존할 수 있을까.

    올 여름 유난히도 산사태가 많았다. 이구동성 난개발이 원인이라 말한다. 우리 뇌도 마찬가지 아닐까. 늘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텅텅 비어 간다. 달콤할수록 더한 갈증을 느끼는 것과 같다. 온갖 생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건강한 숲처럼 우리의 뇌도 생각할 수 있는 근력을 키워 가야 할 것 같다. 우리 문화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다양해지길 기대한다.

    유희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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