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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근대화 과정에서 잃은 것과 얻은 것- 이배용(한국학중앙연구원장)

  • 기사입력 : 2014-06-05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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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년이면 광복 70주년이 된다. 우리나라는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시련과 갈등을 겪었다. 근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새로운 체제로 가야 할 과제와 침략을 막아야 하는 이중의 막중한 부담을 안고 출발했다. 1876년 개항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항구를 개방해 통상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 역사적 사건이다.

    그동안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프랑스, 미국 등의 통상요구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통상 기회는 물 건너갔다. 결국 후발자본주의국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면서 시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소위 강화도조약이라고 불리는 1876년 체결된 한일수호통상조약은 완전히 불평등한 조건으로 점철됐다.

    준비 안 된 미래는 희망과 보장이 없듯이 제1조부터 ‘조선은 자주국가이며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조문에 우리는 오히려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 안심했지만 일본이 초장에 심리적 무장해제를 시키려는 함정이었고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일본의 입지를 넓히려는 계략이었다. 그 외에 3항구(부산, 후에 원산, 인천 지정)의 개방도 남의 나라 땅에서 일본의 일방적 선정이나, 조선 땅에서 일어나는 일본인 범죄를 일본법으로 처리한다는 치외법권 조항은 후에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줬다. 특히 통상조약인데 관세율이 설정돼 있지 않아 우리 물품을 보호할 근거조차 없는 심히 불평등한 조약이었는데 우리는 전혀 몰랐다. 6년 후 (1882) 미국과 조약을 맺을 때에나 통상조약에 관세율이 설정돼야 함을 뒤늦게 알았지만 많은 것을 일본에게 잃은 후였다.

    한편 거세게 밀려오는 외압을 감당하려면 내부의 결속력이 필수건만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국론분열은 국가의 동력을 떨어뜨리는 데 치명적이었다. 개화세력도 보수세력도 나라의 앞날을 지킨다는 목표는 같았을지 몰라도 방법론에서 평행선을 달리다 보니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상대방에게 틈을 벌려 침략의 길을 열어준 모양이 됐다.

    그럼에도 역사의 한편에서는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고 이 시절의 희망은 교육이었다. 오로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일념으로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 이화학당을 필두로 민간 유지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뻗어나갔다. 바로 근대식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애국심으로 뭉쳐 민족 운동에 앞장서고 계몽운동을 열정적으로 펼쳐 희망의 내일을 준비했다.

    일제시대에도 3·1운동의 불꽃같은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독립을 위한 치열한 투쟁과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35년 만에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8·15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된 지 내년이면 어언 70년이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성장으로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국가의 위상을 떨치면서 오늘날의 성취가 있었다. 이 역사의 길 위에는 애국의 순국선열과 6·25전쟁 때 목숨 바쳐 싸운 전몰장병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이분들에 대한 추념일이 현충일이고 6월은 호국의 달이다.

    내 나라 남이 지켜주지 않는다.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이 얼마나 참담했고, 나라의 소중함이 얼마나 절실한지 임시 정부의 안살림을 도맡고 실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정정화 여사의 귀국전야의 글을 인용해 본다.

    “서신 연락조차 닿지 못했던 중원대륙의 흙바람이 휘몰아칠 때, 손가락같이 굵은 빗줄기가 천형인 듯이 쏟아져 내려와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을 때 그래서 서글프고 쓸쓸할 때마다 늘 생각이 사무치던 곳 그곳이 내 나라였다. 내 조국이었다. 그렇게 조국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어린아이가 집 밖에 나가 놀 때도 어머니는 늘 집 안에 계시듯이 조국은, 잃어버렸던 조국은 그렇게 있었다.” - 정정화 여사 회고록 <녹두꽃>의 ‘해방 후 귀국전야’에서.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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