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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0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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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2)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최후지 '지리산 빗점골'

62년 전 ‘분단의 비극’에 희생된 ‘비운의 지식인’

  • 기사입력 : 2015-08-18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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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점골 너덜겅


    地異風雲堂鴻洞(지리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伐劍千里南州越(벌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一念向時非祖國(일념향시비조국)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胸有萬甲心有血(흉유만갑심유혈)

    -가슴에 단단한 각오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1953년 9월 18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되었을 때 그의 품속에서 나온 한시(漢詩)이다.

    그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포로교환을 하지만 지리산에서 투쟁 중이던 빨치산에 대해서는 남·북 어디에서도 거론하지 않는다. 이로써 빨치산의 운명은 결정되어졌다. 휴전이 되면 북으로 가서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실컷 이용만 당하고 그냥 버려진 것이다. 휴전 후에는 더욱 보급이 차단되고 지리산 산중에 고립돼 옥죄여 오는 대규모 토벌대 앞에 그들은 바람 앞 등불이었다. 이현상은 이미 빨치산의 최후를 예감하고 흐트러지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이현상 최후지와 그의 아지트, 지리산 빗점골

    지리산 역사문화탐방 두 번째 일정으로 지리산 빗점골에 있는 이현상 최후지와 그의 아지트를 찾는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절골을 통해 주능선까지 올랐다가 연하천대피소와 명선봉을 돌아 명선남릉을 타고 다시 빗점골 합수내(하동군 화개면 의신리 삼정마을)로 원점회귀하는 일정이다.

    빗점골 합수내 부근은 산세가 수려한 곳이다. 지리산 주능선 상의 형제봉, 삼각고지, 명선봉, 토끼봉의 남사면 자락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지류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든다. 토끼봉 쪽에서 왼골이 흘러들고 명선봉에서 산태골, 연하천과 형제봉 사이에서 절골이 발원해 이곳으로 흘러들어 합수된다. 그런 형세가 마치 부채살 형상의 머리빗 모양을 하고 있어 ‘빗점골’이란 명칭도 유래됐고 세 개의 큰 골이 합수되는 지점이라 이 부근을 빗점골 합수내라고 부른다. 그래서 빗점골 합수내는 늘 수량이 풍부하고 사시사철 투명한 옥수가 넘치는 곳이다.

    아름다운 이곳에서 62년 전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한 죽음이 있었고, 그 죽음으로 처절했던 비극의 역사 한 페이지도 마무리지어졌다. 그 역사의 현장 빗점골 너덜겅에 올라서니 숙연한 마음이 앞서며 그때의 현장이 상상 속에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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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흐른바위에서 바라본 빗점골 계곡.



    빗점골을 울리는 통곡소리

    1953년 9월 17일 군·경은 그를 잡기 위해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주변 지리산 일대를 물샐틈없이 포위한다. 그리고 사위(四圍)를 분간하기 어려운 캄캄한 한밤중,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붉은 섬광이 빗발처럼 오간다. 그 속에서 선혈이 튀고 일순 사위는 어둠보다 더 깊은 적막감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11시경, 너덜겅에는 통곡소리가 빗점골을 메아리친다. 그들은 이현상의 7인조 호위병 중 두 명, 김진영과 김은석이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울부짖으며 한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한다. 그 주검은 바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었다.

    잠시 그날의 한 장면을 떠올리다가 이현상의 최후지 너덜겅을 찬찬히 둘러본다. 너덜겅은 합수내 위쪽으로 비스듬히 세로로 길게 형성돼 있다. 1953년 9월 18일 오전 11시경,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이곳에서 총에 관통상을 입은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시신은 너덜겅 아래 흐른바위에 임시 안치됐다가 곧바로 쌍계사에 설치된 연대지휘부로 옮겨진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3발의 총성으로 한 역사는 마무리된다

    이후 이현상의 시신은 서울로 이송돼 그의 유품과 함께 창경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가 다시 하동 화개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시신 처리에 고민하던 차일혁은 1953년 10월 8일 섬진강 백사장에서 시신을 그의 유품인 염주와 함께 화장하고 뼈를 자신의 철모 안에 넣고 M1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 그리고 그는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 그것은 이현상의 마지막 가는 길에 붙이는 차일혁의 조사(弔辭)였다.

    모든 빨치산이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경해 마지않던 이현상,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고독했던 비운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대척점에 서서 하루속히 지리산 평화를 가져와야 했던 토벌대장 차일혁,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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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른바위



    이현상의 아지트

    탐방팀은 흐른바위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너덜겅을 거슬러 올라 절골 초입을 횡단해 이현상 아지트로 향한다. 계곡물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시원스레 흘러내리고 있다. 수량이 많으니 계곡미가 약한 절골도 곳곳에 소폭이 형성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후지에서 절골을 건너 사면을 타고 15분가량 오르면 이현상 아지트가 나타난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지트는 계곡 가까이 있어 식수확보가 용이하고 짙은 수림 속에 앞뒤와 한쪽 측면이 야트막한 바위로 둘러싸여 있어 적당히 은폐, 엄폐가 되는 곳에 위치했다. 이곳에서 1953년 8월 26일, 그리고 9월 6일, 연이어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가 열렸고 제5지구당 해체를 결정한다. 그때 이현상도 실권을 잃게 되고 평당원으로 강등된다. 그리고 10여 일 뒤 그는 활로를 찾아 하산하다가 너덜겅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었다.

    이현상 아지트를 돌아보고 절골로 진입해 산행을 이어간다. 절골은 이전에 계곡 안에 절이 있어 절골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요즘은 폐허된 절터만 남아 있어 절터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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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상의 아지트



    하산 길 명선남릉

    명선남릉은 명선봉에서 빗점골 합수내까지 뻗어 내린 지능이다. 조망은 없지만 싱그러운 숲 향이 좋다. 폐부 깊숙이 숲 향을 들이켜며 지능을 타고 내린다. 명선봉을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절골 초입부에 도착하고 곧이어 너덜겅 상단을 통과한다. 숲속을 벗어나 작전도로를 걸어내려 삼정마을에 도착하며 7시간 30분간의 탐방산행을 마무리한다.

    돌아오는 섬진강변 길, 62년 전 어느 초가을 날, 3발의 총성이 울렸던 그곳에는 새들이 평화롭게 날갯짓하고 있고 짙푸른 강물은 백사장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국력이 쇠약하고 분열하면 백성의 삶은 처절해진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삶은 선대들의 고단한 역정과 처절한 피의 대가일 것이다.

    글·사진= 김윤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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