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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0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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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5) 우리나라 대표적 '이탄습지' 왕등재 습지

해발 973m 고산지대 생태계 순환 밑거름 ‘생명의 땅’

  • 기사입력 : 2015-09-24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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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대표적 이탄습지로 해발 973m 고지대에 위치하며 348종의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왕등재 습지’.
    탐방팀은 외곡습지를 돌아보고 외고개로 올라서서 왕등재 습지를 향해 지리산 동부능선 길을 걷는다.

    지리산 동부능선 길은 타 구간에 비해 길이 좋다. 대부분 부드러운 흙길이다. 해발고도 1000m 전후로 비교적 낮고 숲이 짙어 조용히 사색하듯 걷기 좋다. 중봉, 하봉을 지나며 점차 고도를 낮춘 동부능선 길은 새봉(해발 1322m)에서 잠시 고도를 높여가다 새재, 외고개를 지나며 1000m 아래로 떨어진다. 탐방팀은 상큼한 숲 향을 맡으며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왕등재 습지로 향한다. 왕등재 습지는 외곡습지에서 동쪽방향으로 1.5km가량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탐방팀은 외고개를 출발한 지 30분 만에 왕등재 습지에 도착한다.

    이 능선 길은 지리산 태극종주 길이기도 하다. 통상 동부능선은 천왕봉에서 웅석봉 구간을 일컫는다. 지리산 태극종주 길(90.5km)은 크게 4개 구간으로 나누는데, 이곳 동부능선을 비롯해 남원 구인월에서 성삼재까지를 서북능선,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를 주능선이라 부르고, 그리고 웅석봉에서 산청군 시천면 사리마을까지를 달뜨기 능선으로 부른다. 산객들은 태극종주 길을 보편적으로 4개 구간으로 나눠 완주하지만, 잠을 자지 않고 무박 2일로 일시에 주파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용맹한 산객들이 있는가 하면, 구간구간 끊어서 체력에 맞춰 도전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넓히고 대지리(大智異)의 변화무쌍한 모습에 감동하고 경외감도 가진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을 이해하고 아끼게 되며 그 인생 또한 경험만큼 여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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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식물들이 낮은 온도 때문에 미생물 분해가 안된 채 쌓여 만들어진 습지를 이탄습지라 한다.


    ▲왕등재 습지

    우리나라 대표적 이탄습지로 348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왕등재 습지는 외곡습지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키 큰 참억새와 달뿌리풀이 울창한 외곡습지와는 달리 왕등재 습지에는 키 작은 사초류가 습지를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습지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든다. 왕등재 습지는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산 51의 해발 973m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약 6000㎡이고 이탄층의 깊이는 0.5~1.5m, 지질은 알칼리성을 유지하고 있고 습지의 주요 수원은 강우와 지하수라고 한다.

    습지는 그 자체로 유기물의 보고이다. 오랜 세월 동안 동식물이 죽고 분해되어 퇴적된 유기물 속에서 수많은 기초생물들이 재탄생하고 또 기초생물들을 먹이로 해 고등생물들이 살아간다. 이탄층은 고산지대의 낮은 온도 때문에 죽은 식물들이 제대로 미생물 분해가 이뤄지지 않은 채 쌓여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런 이탄층으로 형성된 습지를 이탄습지라고 하는데 왕등재 습지가 대표적인 이탄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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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등재 습지를 대표하는 늦여름 꽃 '숫잔대', 흰색과 자주색이 고루 피어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자료에 의하면 이곳 습지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인 까막딱따구리와 원앙, 소쩍새 등 72종의 조류와 뻐꾹나리, 꽃창포, 흰제비난, 동의나물 등 58종의 식물류가 자라고 있고 삵, 담비, 멧돼지 등 13종의 포유류를 비롯해 꼬리치레도롱뇽 등 8종의 양서 파충류와 큰땅콩물방개, 산골조개 등 무척추동물 39종, 그리고 물먼지말류 등 담수조류 158종 등 전체 348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이탄층이 잘 발달된 왕등재 습지, 지표면은 물을 가득 머금은 스펀지 같다. 밟으면 푹신하고 물이 배어 나온다. 습지 내부에는 사초류가 빼곡하게 자리 잡아 마치 수확을 앞둔 황금벌판처럼 보인다. 왕등재 습지를 대표하는 늦여름 꽃, 숫잔대가 곳곳에 활짝 피어 있다. 흰숫잔대와 자주색 숫잔대 반반씩 고루 피어 있고 절정을 지난 등골나물도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습지정화식물인 고마리는 이제 막 꽃을 피워 올리는 중이고, 습지 주변에는 9월의 찬 기온에 검푸르게 변색한 양치식물 꿩고비가 한 무더기 군락을 이루고 있고 억새도 윤기 있는 꽃잎을 내밀며 가을마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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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등재 습지를 대표하는 늦여름 꽃 '숫잔대', 흰색과 자주색이 고루 피어 있다.


    이곳의 주요 서식생물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산골조개다. 관찰은 못했지만 해발 973m의 고산습지에 조개류가 서식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산골조개는 이곳뿐만 아니라 외곡습지에도 서식하고 있으며 심지어 아래 계곡에서도 발견돼 조개골이란 이름도 생겨났다. 조개골은 동부 지리산 주요 계곡 중 하나로 써리봉, 중봉, 하봉 동쪽사면에 위치한 아름다운 계곡으로 대원사골의 상류를 이루고 있다.

    한동안 왕등재 습지에 머물며 주변 산세를 살펴본다. 동쪽으로 능선길을 이어가면 밤머리재를 거쳐 웅석봉으로 이어지고, 지나온 서쪽방향은 하봉, 천왕봉 방향이다. 능선 너머 북쪽으로 내려서면 산청 금서면 수철리의 고동재에 이르고, 남쪽으로 내려서면 산청 삼장면 유평리 외곡마을이다. 능선 사거리 갈림길 중심에 왕등재 습지가 있다. 원래 왕등재란 지명은 습지 옆의 해발 1048m 산봉우리를 일컫는데, 왕등재 봉우리 서쪽안부에 습지가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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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지 내부엔 사초류 빼곡하게 자리 잡아. 그늘사초는 마치 수확을 앞둔 황금벌판처럼 보여.


    이곳 주변에는 유독 ‘왕(王)’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왕등재란 ‘왕이 오른 고개’란 의미이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 제10대 구형왕(양왕)이 신라군에 쫓겨 지리산 자락으로 피신해 궁을 세우고 항전했다는 설도 있다. 이곳 왕등재 습지 주변에도 토성과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고 동쪽 약 4km 밖에는 깃대를 꽂아 놓았다는 깃대봉(일명 동왕등재)과 망을 봤다는 ‘망덕재’, 그리고 대원사 인근에는 말을 사육했다는 ‘맹세이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왕등재 북쪽 자락에는 ‘왕의 산’ 왕산(王山)이 있고 그곳에는 가야 왕궁 수정궁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그 아래 골에는 구형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구형왕릉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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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지 주변에 찬 기온 영향으로 검푸른 색이 된 양치식물 꿩고비 군락.


    ▲왕이 오르고 남북 문물이 오갔던 고갯길

    왕의 전설이 가득한 지리산 동부능선 자락, 1500여 년 전에는 가야국 왕이 오르내렸지만 근세까지 남쪽과 북쪽의 문물이 넘나들던 능선이었다. 동서로 길게 뻗은 지리산 능선은 남북 교류의 큰 장애요인이었다. 좌우로 둘러 가긴 너무 멀고, 그래서 주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지리산 동부능선을 이용했다. 하봉에서 밤머리재 사이에는 쑥밭재(청이당고개), 새재, 외고개, 왕등재, 밤머리재 등 다섯 개의 고개가 있다. 비교적 능선까지 거리가 짧고 오르내리기 쉬워 이 고개를 통해 남쪽의 산청군 시천면 덕산장과 북쪽의 금서, 산청장의 문물이 활발하게 오갔었다. 한때는 지리산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였는데, 무상한 세월 속에 이제는 길도 희미하고 잡초만 무성하다. 가끔 나그네 같은 외로운 산객만 찾을 뿐이다. 밤머리재는 도로까지 개설되면서 다 옛날 얘기가 되었다.

    글·사진= 김윤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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