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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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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9) 아픈 역사의 현장 ‘박영발 비트’와 폭포수골

아픔의 겨울… 역사의 거울

  • 기사입력 : 2015-12-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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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때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이 최후를 맞을 때까지 4개월가량 머문 곳으로 알려진 ‘박영발 비트’ 입구.


    지난가을 유난히도 화려했던 지리산의 단풍도 짧은 수명을 다하고 황량함만 묻어나는 뱀사골이다. 가는 세월 아쉬워하듯 계곡가에는 빛바랜 추색을 안고 버티는 잎새들, 가을 여운 간직한 말라비틀어진 잎은 안간힘을 다해 끝까지 버텨 보지만 나무는 코앞에 이른 겨울을 대비해 기어코 떨쳐내고 있다. 탐방팀은 반선교를 건너 겨울 채비를 완전히 마친 회색빛의 뱀사골로 들어선다.

    이번 탐방지는 근대사의 아픈 역사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이다. 반야봉 북사면 자락 중턱에 위치한 이 비트는 6·25전쟁 때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이 최후를 맞을 때까지 머문 곳으로 일명 ‘박영발 비트’로 불리고 있다. 당시 지리 산중에는 수많은 빨치산 비트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대략적인 위치만 구전으로 내려올 뿐인데 박영발 비트는 암반으로 이루어진 석굴이라 유일하게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비트는 10년 전인 2005년도에 비전향장기수의 안내로 발견됐고 일부 흔적은 역사성을 감안해 그대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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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발 비트의 외실.

    탐방산행은 남원 산내면 반선리 뱀사골 입구를 출발해 뱀사골을 오르다가 유유교 부근에서 우측으로 반야봉 방향의 지계곡인 폭포수골로 진입해 계곡 상단까지 치고 오른 후, 인근 반야봉 북사면에 위치한 박영발 비트를 탐사하고 묘향대를 거쳐 함박골로 하산하는 일정이다.

    뱀사골 등산로는 반선에서 주능선상의 화개재까지 9.2km의 거리로 상당히 긴 코스에 속한다. 그리고 뱀사골은 지리산을 대표하는 주요 계곡 중 하나로 골이 넓고 완만하며 와운골, 함박골, 얼음골, 폭포수골, 막차골 등 굵직한 지계곡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사시사철 청류가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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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뱀사골.

    ▲겨울채비 마친 뱀사골엔 청류가 흐르고

    탐방팀은 편안한 등로와 수려한 계곡미를 감상하며 여유롭게 뱀사골을 오른다. 최근에 잦은 겨울비로 뱀사골에는 여름 못지않게 수량이 많다. 곳곳의 소와 담은 청류를 가득 담았고, 즐비하게 늘어선 소폭과 암반을 만난 청류는 청아한 물소리와 함께 하얀 포말을 만들며 호호탕탕 흘러내리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거스르는 듯 생동감과 역동성이 넘치는 뱀사골 모습이다.

    등산로는 줄곧 계곡 좌우를 오가며 이어지는지라 뱀사골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뱀사골에는 크고 너른 소가 유독 많다. 탁용소, 뱀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를 차례로 지나 간장소에 이른다. 옛적 하동 화개장터에서 소금을 사서 화개재를 넘어오던 소금상인들이 그만 이 소에 소금 짐을 빠뜨려 간장물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이 소를 간장소라고 부르는데, 쌍갈래 와폭에 이은 작은 폭포가 하얀 물보라를 만들고 청류를 가득 담은 간장소는 햇살에 반짝인다.

    간장소를 지나고 유유교를 건넌다. 유유교는 폭포수골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다리 조금 위에 폭포수골 초입이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타나는 이정표는 반선에서 6.8km를 올랐고 화개재가 2.4km 남았음을 알리고 있다. 반선 뱀사골 초입에서 여기까지 2시간 30분가량 소요됐다. 이 부근에서 우측으로 뱀사골 본류를 건너 폭포수골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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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사골의 병소.

    ▲하얀 포말 쏟아내는 폭포수골

    폭포수골은 유유교 부근에서 반야봉을 향해 뻗어 있는 뱀사골의 지계곡으로 경사가 가파르고 폭포가 많아 폭포수골로 불리고 있다. 탐방팀은 폭포수골 초입으로 들어서며 잠시 숨을 돌리고 쉬어간다. 폭포수골 등로는 뚜렷하지 않다. 계곡으로 직등하다가 막히면 좌우로 우회하고 다시 계곡으로 내려서서 오른다. 덕분에 줄줄이 나타나는 폭포 조망과 거친 계곡미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 지겨울 틈도 없이 흥이 난다. 겨울 채비를 마친 황량한 계곡이지만 본류 못지않은 수량과 곳곳의 크고 작은 폭포들이 계곡 온통 하얀 물보라를 만들어내고 있다. 폭포수골은 운치 있고 편안한 뱀사골 분위기와는 달리 급박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계곡미를 선사한다.

    폭포수골 초입에서 2시간가량 계곡을 타고 오르다가 계곡 상부에서 좌측사면을 타고 오르며 박영발 비트로 향한다. 잠시 사면길을 오르면 묘향대로 이어지는 희미한 길을 만나고 약간 좌측으로 우회해서 올라서면 능선 바로 아래 바위지대, 그 한가운데 바위틈 속에 박영발 비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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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발 비트의 내실.

    ▲박영발의 마지막 지휘소

    반야봉 북사면 산중턱, 해발 1330m 부근의 바위틈에 자리 잡은 박영발 비트. 주변 지형 지물상 감쪽같이 엄폐·은폐되어 발견하기 쉽지 않은 천연의 요새다. 이곳은 남로당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이 1953년 10월부터 그가 최후를 맞은 이듬해 2월까지 4개월가량 지휘본부로 사용하던 곳이다. 오목한 바위지대, 약 2m 깊이의 좁다란 바위 홈이 보이고 사다리로 바위 홈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비트인 바위 굴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사다리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는 구조이며 바깥에서는 굴 입구가 보이지 않아 정말 감쪽같은 곳이다.

    탐방팀은 랜턴을 준비하고 사다리를 이용해서 비트 속으로 진입해 암굴을 살펴본다. 바위 틈을 기어들어가야 하니 진입도 쉽지 않다. 암굴은 한 평 남짓한 크기로 설 수는 없고 서너 명 둘러앉을 수 있는 규모이다. 캄캄한 굴속을 랜턴으로 비춰보니 당시에 무전 등 통신용으로 활용하던 전선(일명 삐삐선)도 보인다. 암굴 속에 또 다른 암굴이 있다. 컴컴한 어둠 속에 무저갱 입구처럼 아가리를 벌린 암굴 입구, 선뜻 진입하기 망설여지지만 비좁은 통로로 겨우 몸을 뻗어 기어서 진입하니 또 다른 좁은 공간이 나타난다. 암굴 속에 내실과 외실이 있는 셈이다. 안쪽 암굴에는 당시에 쓰던 무전기 배터리도 보인다. 액이 흘러나와 허옇게 변한 모습이다.

    62년 전 이맘때의 겨울, 백설로 하얗게 변한 반야봉 북사면 중턱의 이 비좁은 암굴 속에서 그들은 혹한의 겨울을 났을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당시 이곳에는 박영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비롯해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2월경 토벌대에 사살되며 파란만장했던 청춘을 지리산에 묻었다.

    박영발은 경북 봉화 출신으로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좌익 항일 운동을 했고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남조선 노동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7년 남한에서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해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온다. 그는 1950년 6·25 때 남하해 전남도당 위원장을 맡지만 인민군 후퇴로 지리산에 고립돼 유격전을 펼치다가 지리산에서 고혼이 되고 만다. 평양의 애국열사릉에는 지리산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을 비롯해 전북도당 위원장이었던 방준표와 그의 가묘도 설치돼 있다고 한다.

    탐방팀은 아픈 역사의 현장 박영발 비트를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보고 다시는 우리 민족 앞에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마음을 새기며 우리나라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절집, 묘향암이 있는 묘향대로 발길을 돌린다. (묘향대는 다음 호에 게재한다) 글·사진=김윤관 기자 kimy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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