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20일 (월)
전체메뉴

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15) 노고단(老姑檀)과 남악제(南岳祭)

고려시대부터 국가와 백성을 위해 제사 지내던 곳

  • 기사입력 : 2016-03-08 22:00:00
  •   
  •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무심히 한 계절을 보내고 이제 봄의 문턱을 넘어섰다. 하지만 기상이변이 잦은 요즘, 아직은 종잡을 수 없어 갑자기 한랭전선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겨울을 보내며 봄 마중하듯 지리산의 설화와 전설을 찾아 떠나본다. 탐방지는 지리산 주능선 서쪽 관문을 당당히 지키고 있는 노고단과 종석대, 그리고 우번암과 상선암이다. 노고단은 이름에서 느껴지듯 제를 지내던 신단이 있었던 곳이고 이웃한 종석대와 우번암, 상선암은 우번조사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른 아침, 탐방 기점인 성삼재에는 찬바람과 함께 눈발이 휘날린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차가운 날씨, 이럴 때는 재빨리 걷는 게 상책이다. 탐방팀은 성삼재를 출발해 눈길을 걸어 노고단으로 향한다. 뽀드득거리는 눈길에 주변 숲에는 상고대까지 피어나 아직은 한겨울 분위기다. 잠시 휘날리던 눈발은 그쳤지만 구름이 몰려다니며 차가운 삭풍과 함께 조망을 가리고 심술을 부린다. 이른 아침에도 제법 많은 탐방객들이 노고단 길을 오르내리고 있다. 해발 1090m의 성삼재는 차량 접근이 가능해 사시사철 탐방객이 많은 곳이다. 성삼재 코스는 지리산 주능선에 가장 쉽게 최단거리로 접속할 수 있고, 지리산 서부권의 최고 명봉 노고단(해발 1507m)에 손쉽게 올라 대(大)지리의 장쾌한 조망을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매우 높다.

    메인이미지
    노고단 정상 가는길. 나무계단 길 좌우로 상고대가 형성돼 여전히 한겨울 분위기다.

    2000년 전 변한의 세 장수가 지키던 성삼재

    원래 성삼재에는 군사작전도로가 있었다. 전쟁 후 폐도처럼 버려져 있던 것을 1988년 5월, 성삼재를 관통하는 관광도로로 만들었다. 달궁, 천은사 간의 지리산 관광도로가 개통되면서 서부 지리산 일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름조차 생소하고 한적했던 지리산 고갯마루 성삼재. 2000여년 전에 변한의 각기 성이 다른 세 장수가 철벽 방어선을 구축했던 천연요새인 이곳은 일약 서부 지리산의 관문으로 각광받으며 전국적인 명소가 됐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차량이 몰려들었고 노점상이 생겨나고 술판이 벌어지는 관광지가 된 적도 있었다. 지금은 다 정리되고 안정을 찾았지만, 그래도 늘 탐방객으로 붐빈다. 지리산 청정골인 첩첩오지 달궁, 심원마을에도 여름이면 피서인파가 가득 몰려들며 산중오지는 옛말이 됐다. 개발에 따른 명암은 항상 존재하듯 성삼재도 고산준봉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점으로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지만 지리산 서부권의 최고 명봉, 민족의 신성한 제단이 있던 노고단에 대한 경외심이 많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메인이미지
    외국인 선교사 별장 터


    외국인선교사 별장이 있던 노고단대피소

    산행시간 40여 분, 등에 땀이 배일 즈음 노고단대피소에 닿는다. 잠시 배낭을 벗어놓고 인근 외국선교사들의 별장 터를 돌아본다. 노고단은 아고산대로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풍부하며,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미국, 호주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곳에 풍토병을 피하고 휴양을 위한 별장을 많이 지었다. 한때 52동이나 들어서며 휴양촌을 형성했고 호텔과 공회당, 교회당을 비롯해 발전소, 영화관, 간이풀장 등의 편의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런 영화도 잠깐,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이 발생해 이곳이 격전지가 되면서 거의 모든 시설이 파괴됐다. 이후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빨치산과 국군토벌대 간의 격전으로 또다시 노고단은 초토화됐다. 주변 수목도 그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아쉽게도 키 낮은 관목류만 자라고 있다.

    메인이미지
    노고단 고개


    노고단 자락, 삭풍 속에 화려한 상고대

    선교사 별장 터를 돌아보고 대피소 취사장에서 들렀다가 간다.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 팀도 있고, 겨울 지리산 종주산행에 나선 용감한 여성 등반 팀도 보인다. 간식을 들며 잠시 쉬었다가 노고단 고개에 올라선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고 능선은 온통 운해 속에 잠겼다. 서쪽 끝 노고단에서 시작해 동으로 천왕봉까지 25.5km를 내달리는 주능선, 종주출발점 입구가 힘든 여정을 얘기하듯 운해 속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구름 속 주능길을 일견하고 노고단 정상을 향해 오른다. 북풍이 거세게 몰아친다. 벌써 정상을 돌아 내려오는 탐방객도 보인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있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내려오고 있다. 나무계단 길 좌우에는 상고대가 멋지게 형성됐다. 지금은 삭풍 속에 상고대뿐이지만 봄, 여름이면 기화요초 만발할 것이다. 나무 보도를 만들고 탐방예약제를 실시하면서 식생이 많이 복원됐다. 특히 이곳에는 원추리, 술패랭이꽃, 기린초가 많이 식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여름이면 꽃며느리밥풀, 까치수염, 비비추, 이질풀, 동자꽃 등 야생화들이 가득 피어나며 천상화원을 이룬다.

    1507m 노고단 정상은 구름 속에 얼핏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중에 오를 종석대를 우측으로 조망하며 거센 북풍을 뚫고 노고단 정상에 올라선다. 성삼재를 출발한 지 1시간 20분 만이다. 노고단은 지리10경 중 하나인 노고운해가 일품이고, 동으로 뻗은 주능선 조망이 좋은 곳이다. 특히 한겨울 눈 덮인 주능선 조망이 멋진 곳인데 오늘은 노고 할머니께서 허락하지 않는다.

    메인이미지
    노고단 정상(1507m) 돌탑


    남악제를 지내던 영봉 노고단

    노고단은 동쪽의 천왕봉과 더불어 지리산 서쪽을 지키는 신령스런 영봉이다. 노고단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매년 봄, 가을에 제를 올렸던 곳이다. ‘노고단(老姑壇)’이란 이름도 선도성모를 일컫는 노고(老姑)와 제를 지내던 신단이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가 어울려 유래되었다. 또한 신라 화랑들이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수련 장소이기도 했고, 고려조 이후에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국가적 제사인 남악제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였다. 이런 신령스런 의미가 깃든 노고단, 제단은 없어지고 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61년 민족종교단체에서 다시 돌탑을 만들고 매년 중양절(9월 9일)에 국태민안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며 노고단 산신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메인이미지
    남악사(南岳祠)


    남악제(南岳祭)는 신라 진흥왕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당시 신라는 신라 5악을 정해 신성시했는데, 그중 지리산은 남악(南岳)이다. 신라오악으로 토함산이 동악, 계룡산이 서악, 태백산이 북악, 팔공산이 중악이었다. 신라는 남악인 지리산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국가적인 중사(中祀), 남악제를 지냈다. 신라 때는 천왕봉에서 남악제를 지냈고, 고려 때는 노고단에서 제를 올렸다. 조선조에서는 오르기 힘든 산봉우리가 아닌 구례 광의면 온당리 당동에 남악사(南岳祠)를 짓고 국가 차원의 남악제를 지냈는데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제단도 헐리고 산신제도 사라졌다. 이후 한동안 잊혔다가 1969년 구례군에서 화엄사 입구에 남악사를 짓고 매년 곡우 무렵에 ‘약수제’란 이름으로 민속행사와 함께 제를 올리며 지역 문화축제 형태로 그나마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신라 진흥왕 이후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1300여년간 면면히 이어져 온 지리산 남악제, 그 중심의 한 곳이 노고단이다. 선조들이 해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제를 올렸던 민족의 신성한 장소 노고단, 이곳에 오늘은 차가운 강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탐방팀은 그 시대의 의미를 경건한 마음으로 되새기며 정상 돌탑을 한 바퀴 돌아보고 종석대를 향해 걷는다. 종석대와 우번대는 다음 호에 싣는다.

    김윤관 기자 kimyk@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김윤관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