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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어느 작은 여행 인상- 정진혜(서양화가)

  • 기사입력 : 2016-12-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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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여고 친구 셋이서 여행을 했다. 우리 세 사람은 17세 때부터 학교를 같이 다녔고 미술학원도 같이 다니는 소위 미술부 삼총사였다.

    우리는 서로 다른 대학을 갔고 학년도 달랐지만 늘 만남을 유지하며 젊은 날을 함께했다. 그러다 셋 중 한 친구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해 지금 큰아이가 이십대 중반이 됐고, 또 한 친구는 졸업 후 10년 뒤에 결혼을 해 큰아이가 이제 15살이다. 그 가운데 5년이라는 경계에 나의 삶이 있다.

    대학 졸업 이후 두 친구는 미술교사가 됐고 나는 전업 화가가 돼 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기 바빴고 사회적 위치도 달랐다. 그러다 삼십대 중반에는 다 같이 ‘엄마’가 돼 같은 서열(?)에 서게 됐지만 오히려 우리의 만남은 물리적으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육아, 자녀 교육’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던 지난봄, 십수 년의 갈애를 해소시켜 주는 우연한 만남이 이뤄졌다. 그날 이후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다시 기억의 강을 건너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남이 자주 이뤄졌다. 만남의 침체기였던 지난 15년은 발효를 위한 숙성의 시간이었음을 방증하듯 우리의 재회는 더욱 깊고 따스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룻밤도 함께 자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얘기하며, ‘여행’을 같이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며칠 전 ‘1박2일’이라는 짧고 작은 여행을 했다. 고작 하룻밤을 위한 여행이라지만 우리에겐 대단한 꿈과 같은 여행이었다. 떠나기 직전의 설렘은 함께 다니면서 더 큰 즐거움과 행복감으로 전환됐다. 시선이 머물고 마음이 끌리는 대로 움직이자는 자유분방한 사고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 치의 엇갈림 없이 의기투합됐다.

    우리는 한 도시의 바닷가를 자유로이 일주했다. 숙소를 한적한 곳으로 두고 싶어 두리번거리다가 도로 위쪽의 아득한 불빛을 보고 찾아갔다. 오래된 펜션이었으며, 민박집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그러나 오히려 더 좋았다. 여장을 풀고 저녁밥을 먹기 위해 불빛이 많은 부둣가의 제법 큰 마을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웬 이런 상황이? 가까이 가서 보니 비대한 건물들은 대부분이 유령의 집처럼 비어 있었고 숙소나 식당은 아예 손님이 없거나 영업을 하지 않은 채 네온 불빛만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럼 저 불빛들은? 갑자기 황망한 바람이 우리를 스쳤다.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듯한 저 불협화음의 씁쓸한 풍경과 머릿속을 가르고 스치는 황량한 바람에 우리는 침묵했다. 등대가 가까운 방파제 끝에 가서 앉아서야 허허로이 웃으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좀 그렇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지금의 기분” 하는 표정으로. 컵라면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서야 우리는 중년의 세월호에 승선했다. 우리가 탄 밤배는 더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20년 전, 10년 전,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10년까지를 얘기하다가 이른 아침에 이르렀다.

    우리가 머문 방은 부둣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예쁜 포구와 등대가 있는 마을은 지난 밤의 소란스런 네온불로부터 벗어나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을 보여 줬고, 하늘과 바람마저 선홍색으로 물들이며 태양은 마을을 향해 떠올랐다. 예기치 못한 진풍경에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편한 자세로 턱을 고인 채 느긋이 바다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태양을 오롯이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지난밤의 그 현란한 불빛들은 진정 문명의 이기가 낳은 고독이었던가.

    우리는 민박집 아주머니께 “10년 후에 꼭 다시 올 테니 그때에도 여기 계셔야 돼요”라고 인사했으며, 따뜻하고 착해 보이는 아주머니도 꼭 그러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서로의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의 햇살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이번 여행을 기점으로 우리 세 사람도 어쩌면 앞으로의 10년 동안은 자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과 함께.

    정진혜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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