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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복원수(口腹寃讐)- 이상권 정치부 부장

  • 기사입력 : 2018-05-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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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 신분은 출생이 결정했다. 사람을 소유화한 노비제는 가장 오래도록 가혹한 조건에서 존속했다. 부모 가운데 한 명이라도 노비이면 자손은 대대로 그 신분을 이어받았다. 점령지 백성이나 전쟁포로가 아닌 자국민을 태생부터 노예로 삼아 혹독하게 부린 경우는 유례가 드물다. 우리는 세계 문명국가 중 가장 혹독하고 오랫동안 노예를 두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그것도 외세에 의해 노비제를 폐지했다.

    ▼인류는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진화했다. 출생이 아닌 계약을 통한 고용 관계로 형식만 바뀌었을 뿐 자본력에 바탕을 둔 선민의식은 여전하다. 1997년 5조7000억원의 부실대출을 남기고 국가 외환위기 단초를 제공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국회청문회에서 내뱉은 한마디가 한동안 세인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한 국회의원이 “한보그룹 전문경영인이 공개한 비자금 액수와 당신이 공개한 액수가 왜 다르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정 회장은 “머슴이 뭘 알겠는가. 주인인 내가 잘 안다”고 했다.

    ▼노비제가 폐지된 지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 적폐는 내재한 불량 유전자를 통해 여전히 대물림하고 있다. 사회 도처에 ‘갑질’ 고발이 잇따르고 있다. 금력과 권력을 무기 삼은 무차별 착취와 인격살인이다. 최근 직원을 노예처럼 부린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막된 언행이 또다시 도마에 올라 공분을 사고 있다. 이들에게 임직원은 과거 부농이나 지주에게 고용돼 품삯을 받는 한낱 머슴이나 노비에 불과한 존재다.

    ▼이팝나무가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꽃술이 마치 쌀을 흩어놓은 듯해 쌀밥나무로도 부른다. 가난한 현실을 시각적으로나마 위안 삼고자 한 역설이 담겼다. 하얀 쌀밥 한 그릇이 소원이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다. 이제는 사라진 ‘보릿고개’가 꼭 이맘때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있다. 온갖 갑질에 자존감이 짓밟혀도 견디는 버팀목은 결국 먹고사는 문제에 귀결한다. 구복원수(口腹寃讐), 입과 배가 원수다.

    이상권 정치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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