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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76주년 수습이 간다] 정의가 바로 서는 그날까지… 세상은 우리가 수습한다

  • 기사입력 : 2022-03-01 20: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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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년 3월 1일 창간한 경남신문은 오늘 76주년을 맞았습니다. 경남신문은 강산이 무려 7번이나 바뀌는 긴 세월 동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경남도민들과 함께했습니다.

    때론 지역 소식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거나 소홀할 땐 도민들로부터 따끔한 질타를 받기도 하고, 때론 도민들의 삶이 나아지는데 힘이 되기도 하면서 경남 도민을 대변하는 지역대표 종합신문으로 성장했습니다.

    경남신문은 창간 76년을 맞아 앞으로 도민들과 함께할 제51기 수습기자 3명을 새로 뽑았습니다. 3명의 수습기자들이 기자로서, 사회초년생으로서 어떤 마음으로 출발하는지 속내와 각오를 들어봅니다.


    〈박준혁 수습기자〉


    2월 초에 있었던 수습기자 연수 중 만난 머니투데이방송 유민우 기자와 청와대 춘추관 앞을 산책했습니다. 춘추관은 청와대 프레스센터로 각 언론사 기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을 지나가다 보니 이 두 남자가 어떤 매력에 꽂혀 박봉에 힘든 직업으로 알려진 기자를 선택했는지 궁금했습니다. ‘항상 공부할 수 있다’,‘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비교적 자유롭다’ 등 생각보다(?) 많은 매력이 나왔습니다. 제일은 누구에게나 질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전공 수업이 끝날 때 궁금한 점들을 교수님께 자주 여쭤봤습니다. 물론 다른 학생들이 싫어했습니다. 수업 끝날 때쯤 질문을 많이 하는 건 눈치 없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싸늘한 눈초리가 느껴져 질문을 참은 적도 많았습니다.

    신문을 볼 때도 궁금한 것들이 생겼습니다. ‘왜 이런 정책을 하지?’, ‘예산을 생각하고 하는건가?’, ‘효과는 있었는가?’ 일반 시민으로는 이런 궁금증을 풀기는 힘들었습니다만, 지금은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자가 됐습니다.

    경남신문에 입사 후 지금까지 가장 많이 한 일은 질문이었습니다. 기사 한 줄을 쓰기 위해 취재원을 찾아 전화를 걸어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면 답하는 취재원이 ‘요즘 기자 되기 참 쉽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형편없는 질문도 많이 했습니다. ‘아 이것도 물어봤어야 했는데’라며 다시 전화를 건 적도 많습니다.

    질문하지 않는 한국기자들이 외신에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2010년 서울 G20 폐막기자회견장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를 줬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중국 기자가 질문권을 얻었습니다. 아마 기자들은 두려웠을 겁니다. 이상한 질문으로 타 언론사로부터 비판받지 않을까. 유창하게 영어를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은 언론 신뢰를 떨어뜨렸습니다.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으니 가짜 뉴스가 넘쳐났고, 뉴스의 질은 떨어졌습니다. 이 두려움을 뿌리치고 헌법에 적힌 ‘알권리’를 위해 질문하는 자세를 가지고 싶습니다.

    50년간 백악관을 출입했던 헬렌 토마스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력자에게 질문할 수 없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기자는 질문하는 것이 특권이고, 대통령은 기자의 질문에 답할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이 두 말을 명심하며 도민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언젠가는 ‘경남의 헬렌 토마스’라는 별칭이 달리길 꿈꾸며 취재를 나갑니다.


    〈어태희 수습기자〉


    “경남에서 하는 치킨집이 서울에서 하는 치킨집보다 평균적으로 3년 더 간대. 증거 있냐고? 뻥이야. 이렇게라도 안 하면 우리가 너무 불쌍하잖아.”

    대학교 4학년. 저를 포함해 취업을 앞둔 신문방송학과 동문들은 막막한 취업길에 자주 대학로 술집에 모여 이런 자조적인 농담을 주고받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운 게 영상, 광고,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등의 것들인데 경남에는 관련된 직장이 없거나 그 입구가 바늘구멍 만큼 좁았습니다.

    저는 어찌 경남에 남을 수 있었지만 동문들은 자신의 길을 찾아 전국 곳곳으로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13일, 교육을 받기 위해 찾은 서울에서 오랜만에 동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광고대행업체에 근무하는 세영(가명·30)과 서울의 한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은미(가명·29)입니다. 각각 김해와 창원이 고향으로 서울에서 자리 잡은 지는 5년과 6년이 됐습니다.

    특히 세영이에게 서울은 첫 타향살이가 아닙니다. 세영이는 “경남에는 마케팅과 관련해 내가 원하는 업무와 연봉을 맞춰줄 곳이 없었다. 그나마 가까운 부산으로 취업을 했다가 조건 때문에 서울까지 눈을 돌리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언론 분야에 전문성을 키우고 싶었던 은미는 경남에도 유사한 전공의 대학원이 있었지만 일부러 서울행을 택했습니다. 은미는 “이쪽 업계에 종사하려면 서울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습니다.

    결론적으로 두 친구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음에 만족한다”고 얘기합니다. 극복해야 할 것은 이런 생활 속에서 문득 고개를 내미는 감정들입니다. 멀리 떨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 혼자라는 공허함, 치솟는 집값으로 인한 불안감 등이 그것입니다. 제 친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연어들은 오랜 시간 향수병을 앓습니다.

    경남 또한 떠나가는 연어들로 속이 썩고 있습니다. 경남에는 청년 유출, 특히 20대 여성의 전출 증가가 가장 가파릅니다. 주된 이유는 일자리 부족입니다.

    이런 좋은 인재들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고 있는 경남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타향을 선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은미는 “내 발로 갔지만 완전히 자의라고 할 순 없다”고 말합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옳습니다.

    저는 이런 사회의 불합리함을 고쳐가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정확히는 사람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경남을 만들고 싶습니다. 앞으로 기자로서 좋은 일들보다 나쁜 일들을 더 많이 얘기하겠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발전의 기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거창한 목표지만 작은 것 하나하나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작은 돌덩이를 올려나가다 보면 근사한 탑이 하나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노윤주 수습기자〉


    “언론사는 늘어나는데 독자는 줄어든다. 기사 구독률은 늘어나는데 신문 구독률은 줄어든다.” 대학생 시절 일간지 신문기자 선배의 한숨과 함께 나온 말씀이었다. 선배는 기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방송기자를 꿈꾸면 방송을, 신문기자를 꿈꾸는 것이면 신문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기자에게 가장 좋은 참고서는 기사다.”라는 말씀으로 강연을 마무리하셨다. 선배의 마지막 말이 끝나고 종이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신문은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됐다. 큰 회색 종이에 묵직한 잉크가 빼곡히 박혀있는, 정보를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매체 중 하나인 종이신문을 읽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다. 이 습관은 기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2018년 6월부터 시작됐다.

    인터넷이나 모바일이 아니라 종이신문으로 직접 기사를 읽다 보니 기사의 중요도와 사진, 글의 배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또한, 신문을 읽을수록 신문의 구성을 알게 되었다. 각 면의 의미와 탑 기사, 박스 기사, 꼬리 기사 등의 배치를 보게 되었다.

    지난 2월 7일, 경남신문에 입사했다. 20면의 신문 하나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현장에 달려가고 노력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었는지 실감하고 있다.

    경남신문 윤전실은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저녁 가동된다. 저녁 9시 이후부터 큰 소리와 함께 윤전기에서는 신문이 인쇄되어 나왔다. 종이와 잉크가 신문이 되는 순간이다. 윤전기에서 신문이 나오는 순간 벅차오르는,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일렁였다. 신문은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높이의 윤전기를 지나면 총 20면의 지면이 찍혀 발간된다. 각 부서의 기자들이 쓴 글이 편집을 거쳐 인쇄되고 배부되며 읽힌다는 사실에 책임감은 더욱 커졌다.

    지난 1월 28일 ‘편집기자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문자를 받았다. 합격 통보를 받고 주체 못할 기쁨을 뒤로 하고 덜컥 겁이 났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간절히 원했던 꿈이었지만 막상 다가오니 걱정부터 되었다.

    독자들이 신뢰하는 신문,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신문을 만드는 것이 내가 신문기자를 꿈꾼 이유다. 편집기자는 최후의 기자이자, 최초의 독자라고 했다. 현재의 나는 아직 신문 편집에 대해서는 1㎝도 채 나아가지 못하는 새내기다. 독자들에게, 선배들에게 피해가지 않도록 신뢰할 수 있도록 나는 신문을 열심히 볼 것이다. 그리고 분석하고 탐구하며 공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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