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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등공민학교를 기억하십니까- 유장근(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기사입력 : 2022-03-23 19: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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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들어 우리는 마산지역의 고등공민학교에 관한 연구를 끝냈다. 돌이켜보니 마산의 상남동 지역에 남겨진 역사와 문화유산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이곳의 제비산에 선화고등공민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산역사의 중요한 유산이었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 종합해보니 마산지역에서는 적어도 1949년에 고등공민학교가 처음으로 인가됐고, 그 최후는 1985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설립 직후 의신여자고등공민학교로 개명한 마산여자고등공민학교를 비롯해 노동자 자녀 중심의 마산고등공민, 구세군 마산영에서 세운 구세군고등공민, 대창고등공민이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웨슬레고등공민도 여기에 합류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위에서 말한 선화도 가세했다.

    이런 발전에 힘입어 1960~70년대에는 마산지역에서 고등공민학교의 전성기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서울이나 대구 지역이 쇠퇴하던 흐름과는 달랐던 것이다. 왜 이런 양상이 나타났을까? 그것은 개항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마산사회에 불어닥친 인구동향과 그에 수반해서 생산된 광범위한 빈민층, 그리고 지역엘리트들의 헌신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거 같다. 도시 빈민의 지속적인 증가는 결국 도시사회의 문제였고 특히 이들 자녀의 교육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 시작은 이미 개항 직후에 도시의 상공인 엘리트들에 의해 마산야학이라는 형태로 시작됐다. 노동자와 그 자녀들을 위해, 신식교육제도를 도입해 공민사회교육의 단서를 열었던 것이다. 사실 고공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주된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신도 돈을 벌어 집안 경제에 도움을 줘야 할 처지의 청소년들이었다. 신문배달, 구두닦이, 공장의 노동자, 부두나 시장의 보조노동 등이 그들의 일자리였다. 고공은 학비가 없거나 저렴했기에, 또 다른 일을 겸할 수 있도록 배려했기에 이들이 다니기에 좀 여유로웠다. 그러나 여기에도 물론 고공생이라고 하는 타이틀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졸업생 중에는 그곳이라도 졸업했기에 사회 진출이 좀 더 용이했다고도 말한다. 어떤 형태로든 정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 어린 청소년들에게 주경야독은 힘든 일이다. 연구과정에서 만난 고공의 졸업생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설움에 복받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학력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마산지역의 고등공민학교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 그 시대적 소임을 다했고, 도시엘리트들 역시 사회에서 맡은 공공적 책임을 잘 마무리지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나름대로 시대의 과제와 맞서면서 이걸 극복하려고 했으니 우리 시대의 발전에는 그 분들의 몫도 당연히 들어 있는 것이다. 5000~6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그 전통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잊혀져서는 안되는 존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장근(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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