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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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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김시탁(시인)

  • 기사입력 : 2022-05-25 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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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역 당국이 사회적 거리두기와 실외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지 눈치가 보이는지 거리에는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식사할 때 잠깐 여닫고 가린 입이 마스크를 벗고 찔레꽃 향기 듬뿍 묻은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면 얼마나 상쾌할까. 그동안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상이 무너져서 절망을 한 바가지씩 퍼마시며 암울했던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사방 지천에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 요란하더니 꽃들이 서둘러 피어났다. 외진 강기슭의 야생화도 온몸을 흔들더니 제비꽃이 피고 엉겅퀴가 피었다. 과수원 울타리를 감고 바람의 엉덩이를 찌르던 가시 사이에서는 탱자꽃이 말갛게 얼굴을 내밀었다. 앞마당 화단에는 향 찔레와 왜철쭉 해당화가 눈부시고 창포보다 잎이 넓은 붓꽃은 자색 물감을 듬뿍 찍은 붓으로 허공을 터치해 멍울 같은 꽃을 그려냈다. 얼어붙은 사람들 가슴은 아랑곳없이 꽃들은 물 한 바가지 부어주지 않아도 눈치 없이 너무 아름답게 피었다. 그조차도 민폐 같아서 곁눈질로 맞으며 예쁘게 봐주지 못해 미안했다. 봄은 찬란하게 왔지만 사람들 가슴에는 여전히 강물이 흘렀다. 바람골이 생겨 황소바람이 불었다. 무미건조한 시간은 날것으로 먹으나 껍질을 벗겨 먹으나 너무 질겨서 씹을수록 잇몸만 망가질 뿐 소화가 되지 않아 가슴 중앙에 쌀가마니를 올려놓은 듯 답답했다. 소리 없이 사람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며 자가 격리됐다.

    그들은 봉한 입안에서 이중으로 말문을 닫고 가슴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창문을 닫아걸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안에서 외로웠고 밖에 있는 사람은 밖에서 쓸쓸했다. 그들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도 선뜻 연락하지 못하고 들려오는 소리조차 불안해했던 슬프고 우울했던 시절의 연속이었다. 잠재울 수 없는 일상을 기를 쓰고 견디다 보니 문화가 변하고 체제가 변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해가는 걸 몸소 체험하며 낯선 시간들을 씁쓸하게 끌어안고 뒹굴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습관처럼 튀어나왔지만 그 말도 입을 봉한 채 눈빛으로 보내고 가슴으로 전했다. 역병의 창궐은 삶을 건조하고 팍팍하게 만들고도 모자라 송두리째 앗아가기까지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배웅도 없이 떠나보내며 처참한 현실 앞에 주저앉아 가슴을 쳤는가.

    그렇게 견디고 단련되며 우리는 세 번의 봄을 한숨과 눈물로 맞았다. 이제 밖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고 거리두기도 해제됐다. 하지만 사람들이 홀가분하게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건 여전히 확진자는 늘어나는데 그들을 통제할 안전장치가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경직된 마음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밉도록 찬란하게 왔다. 도둑맞은 가을과 억압당한 겨울에도 묵묵히 나무는 뿌리 끝 발가락으로 물을 빨아 당겼고 꽃들은 발뒤꿈치를 들어 꽃대를 밀어 올리며 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으리라. 봄은 간절한 희망 같은 것이어서 안정이 찾아오듯 가슴이 설렜다. 담벼락에 가시를 감추고 꽃봉오리를 밀어 올리는 백장미가 희망을 떠올리게 했고 햇살이 버무리고 바람이 뜯어먹는 이팝꽃은 쑥털털이같이 보여 잃어버린 미각을 되찾게 했다. 이제 입을 봉한 마스크를 벗고 마음을 봉한 마스크마저 벗어 하루속히 근육이 튼튼한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가슴에도 찬란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 주말마다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이 무더기로 날아오고 예식장이 터져나가고 식당도 단체 손님들로 북적거려야 하지 않겠는가. 미안하다고만 하고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나서 잔을 건네고 어깨를 두드리며 마스크 벗은 입으로 주고받을 말들이 있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무사해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잘살자고. 그러고 나서 참 오랜만에 뜨락에 내리는 햇살처럼 밝게 활짝 한 번 웃어보자. 헤프게 웃다가 이빨에 고춧가루 낀 게 보여도 아름답게 봐주겠다. 그조차도 그립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김시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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