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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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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봄에 지니까 봄꽃이다- 이재달(전 MBC경남 국장)

  • 기사입력 : 2023-05-03 19: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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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달쯤 됐으려나, 겨울이 비켜 가면서도 아직 찬 기운과 매운 바람결이 남아있던 무렵이다. 감나무 낙엽으로 뒤덮인 고향 집 화단 한 모퉁이에서 언 땅을 뚫고 수선화가 뾰족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놈과 눈이 딱 마주친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마치 한동안 보지 못한 얼굴을 만난 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라도 치듯이 봄꽃들이 움을 트고 꽃을 피우느라 소란스러웠다. 지난해 한 시절 꽃을 피우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그 꽃들이 때가 되니 다시 피어난 것이다.

    그런데 봄꽃은 한철을 넘기지 못한다. 봄에 꽃을 피웠다가 여름철을 제대로 구경해본 꽃이 어디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짧은 기간 화사함을 발산하고 스스로 사라진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만족할 따름, 누구를 원망하거나 짧은 생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제 분수를 그렇게 잘 알 수가 없다.

    올 봄꽃들의 생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과 작별하기 전에, 그들로부터 배울 게 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머무는 영광의 자리, 자신이 누리는 화양연화의 시간을 오랫동안 지속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더 상승하고 싶은 욕망에 불탄다. 특히 정치인의 상승 욕망은 그들이 지닌 강력한 무기다. 그들은 상승 욕망을 꿈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포장하는 탁월한 기술을 지녔다.

    어느 대담 프로그램에서 경남 출신의 한 유명 정치인은 국회의원을 몇 번씩이나 하고, 현재의 자리까지 오른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꿈이라고 대답했다. 하나의 꿈을 이루고 나면 그다음엔 더 큰 꿈을 꾸면서 살다 보니 그 자리까지 왔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순간 이 사람이 다음에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무리수를 두고 파멸의 길로 들어선 이가 많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을 위해 미궁을 지었지만, 왕은 그처럼 아름다운 궁궐을 지상에 더 이상 세우지 못하도록 부자를 궁궐 꼭대기에 감금한다. 탈출을 결심하고 묘안을 짜던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모아 실로 엮고 밀랍을 발라 날개를 만들었다. 함께 갇힌 아들 이카로스에게도 날개를 달아주며 “너무 높게 날면 태양의 열에 밀랍이 녹으니 너무 높게 날지 마라”고 신신당부했다. 드디어 탈출하는 날, 이카로스는 하늘을 날게 되자 자유로움에 신이 나 아버지의 당부를 깜빡 잊고 아주 높이 날고 말았다. 결국 뜨거운 태양에 깃털을 붙였던 밀랍이 녹으면서 이카로스는 그만 날개를 잃고 바다로 추락하였다.

    우리 주위에도 하루아침에 날개를 잃고 추락한 현대판 이카로스가 수두룩하다. 영웅의 이름을 가진 어떤 이는, 봄꽃들이 꿈틀거릴 무렵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고 태양 가까이 갔다가 그만 날개가 녹아버렸다.

    애국적인 이름을 가진 어떤 이도 그의 말대로 가족 전체가 풍비박산이 나고 조롱거리로 전락했음에도 아직 자신의 욕망 탓이라는 걸 모르는 듯하다. 적정량의 술이 차면 잔 옆 구멍으로 술이 새게 되어 있는 계영배처럼 욕망이란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는 법인데, 우리는 그 사실을 쉽게 잊고 지낸다.

    오늘, 다시 봄꽃을 본다. 파릇파릇한 움을 틔우고 절정을 뽐내던 자태는 어느새 시들시들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명을 다해가는 봄꽃이 결코 추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라질 순간을 알고, 그렇게 몸소 실천하고 있어서다. 그리고 다시 기지개를 켜야 할 자신의 시간을 기억한다. 그들에게 역리란 결코 없다. 모든 걸 순리대로…. 봄꽃은 봄에 진다. 봄에 지기 때문에 봄꽃이 아름답다.

    이재달(전 MBC경남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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