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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역사가 있는 섬, ‘한산도’ 다시 태어난다- 김종부(전 창원부시장)

  • 기사입력 : 2023-06-26 19: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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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산섬은 우리나라 전쟁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한산섬의 추봉도(추원포)는 고려 말 이래 왜구들의 극심한 노략질을 응징하기 위해 1418년(세종 1년)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과 병력 1만7285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 정벌의 대장정에 오른 출정지(지금의 추원·예곡마을)였다.

    한산섬은 지세가 하늘에서 보면 학(鶴)이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나는 형상이고 앞바다에서 바라보면 큰 거북이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풍수지리적으로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산세가 빙 둘러쳐져 배를 숨기기에 편리하고 왜적들이 견내량을 거쳐 호남지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다. 한산대첩 이듬해인 1593년 7월 15일 이곳에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고 초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운주당(運籌堂)을 짓고(선조 26년)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으며, 1597년 2월 26일 왜군의 간계와 모함으로 파직되어 한성으로 압송되기까지 3년8개월 동안 수군 장병들과 함께했던 충무공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관아인 운주당은 소실되었고 한산진(津)은 완전 폐허가 되었다. 이후 영조16년(1740년) 제107대 통제사가 다시 운주당을 중건하면서 이곳을 제승당(制勝堂)이라고 이름 짓고 친필 현판을 걸었는데 이때까지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평화롭던 한산섬 마을은 6·25전쟁 회오리 속에 휘말려 공산군 포로들을 격리시키는 수용소 시설로 징발되고 주민들은 강제로 소개돼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북한의 남침으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유엔군과 한국군에게 붙잡힌 전쟁포로 약 17만명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했다. 이듬해인 1952년 포로들의 폭동이 발생하자 거제도 포로들을 송환 희망자, 송환 반대자, 송환 거부자 등으로 분리하고 가장 강성 친공 포로인 송환희망 북한군 포로 8084명이 용초도 ‘제18포로수용소’로, 송환 희망 북한 민간인 9151명은 추봉도의 ‘제19포로수용소’로 분산 수용됐다. 추봉(추원·예곡), 용초마을 주민들은 졸지에 집과 농토를 잃었다.

    옛날 왜적을 맞아 승리로 조국을 지켜내고 아픈 한국전쟁의 뒤편에서 뜻하지 않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여름철 수많은 태풍의 재난 속에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왔던 한산섬(島).

    지난날의 굴곡을 이겨내고 이제 그 이름 한산(閑山)처럼 한가로움과 여유를 주는 ‘섬’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경남도는 1976년 제승당 성역화 사업 이후 47년 만에 낙후된 시설을 재정비하는 149억원 규모의 ‘이순신 한산 프로젝트’ 추진을 발표했고, 통영 한산도 권역을 글로벌 휴양관광지로 조성하여 ’이순신의 섬’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지난 3월 31일 통영 미륵도 영운항에서 열린 제12회 수산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한산대첩교 건설 약속을 잊지 않고 잘 챙기겠다”며 대선공약 실천 이행을 강조하기도 했다. 충무공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제승당은 어려웠던 일제강점기에도 한산 지역민들에 의해 수호되었으며 1963년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이 국가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고, 1976년 정화사업으로 영역이 넓혀져 오늘에 이르면서 국민교육의 도량이 되고 있다. 한산연륙교인 2.8㎞ ‘한산대첩교’가 준공되면 우리나라에서 6번째 긴 해상 다리가 통영에 탄생하게 된다.

    김종부(전 창원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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