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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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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샛노란 다발, 샛노란 세상- 김수환(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23-09-07 19: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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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침. 겨울 해거름, 마루 위의 걸레는 이미 뻐덩뻐덩 얼어붙고, 터서 쩍쩍 갈라진 아이들의 손발은 차마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차디찬 도랑물에 손발을 담그고 씻을 수가 없어서 대충 닦기만 하고 그대로 저녁을 먹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한 번씩은 밤중에 엄마로부터 이부자리에서 쫓겨나서 시린 도랑으로 내몰리곤 했다. 이젠 도리 없다. 와락, 손발을 확 끌어당기는 도랑물의 그 차갑고 억센 손아귀를 얼른 뿌리치고 물만 묻히고서는 그새 더 언 걸레로 닦는 둥 마는 둥, 이제는 뭔지 모르게 푹 삭은 냄새가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날 할아버지의 목침은 오랜만에 들이닥친 동숙자들 덕분에 늦게까지 잠 못 드는 밤이다.

    봄살. 그렇게 길고도 추운 겨울이 가고. 손등 여러 군데에 터서 패였던 곳에 봄의 살이 차올라 이제는 따갑지도 가렵지도 않게 되었다. 마루에 머무는 볕으로 아직 차가운 바람을 견딜 수 있는 한낮 마루에서 겨우내 길어진 머리를 깎는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엄마의 찰칵거리는 가위소리를 따라서 흰 구름 같은 꿈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내가 베고 있었던 엄마 무릎은 어느새 문밖 감자밭에서 호미질로 바쁘다. 그렇게 산에 들에 파란 봄이 쑥쑥 올라오고 집집마다 육남매 칠남매들의 머리통들이 참외만큼 호박만큼 굵어져 가고 그러는 사이사이 동네의 엄마들은 틈틈이 산에 오른다. 엄마의 바구니에는 고사리 같은 산나물들과 봄에 새로 난 청솔가지 담겨져 오는데, 소나무의 껍질을 얇게 깎아내고 그 속껍질을 치큰치큰 갉아 먹으면 싱그러운 물맛이 나고, 부드러운 속 껍질을 껌처럼 씹다가 삼키면 등에 붙었던 배가 쑤욱 올라온다. 그렇게 엄마의 봄이 간다.

    땡감. 벼가 아이들의 무릎을 지나 허벅지를 더듬을 때쯤이면 도랑 가 오이의 가시가 제법 앙칼스러워진다. 뒷집 병찬이 아버지가 놓은 올무에 잡힌 오소리 발바닥같이 거칠어진 아이들의 손바닥으로 오이를 따서 쓰윽 훑어서 아삭아삭 베어먹는다. 그 옆에 자줏빛으로 달린 텁텁한 가지도 뚝 꺾이고 어느새 옹골차게 자란 짙은 초록빛 땡감도 아이들 입맛을 당긴다. 새나 짐승들이 온종일 날쌔게 달려가고 날고 노래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듯이, 어느 날 갑자기 어른처럼 콧잔등에 수염 같은 것이 한두 개 생기기 전까지는, 그래서 비로소 아이 티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하루 내내 먹는 일과 재미있게 노는 일로 아이들의 여름이 갔다. 그 검게 그을은 얼굴과 군살도 하나 없고 근심도 걱정도 하나 없던 구릿빛 여름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샛노란. 온 세상이 다 노랗던 때가 있었다. 오늘따라 강아지처럼, 소처럼, 냇물처럼, 구름처럼 이유도 없이 늘 내 곁에 있던 아이들은 또 어디로 내뺐는지 온 마을이 텅 비었다. 샛노랗게 비었다. 추석 때 새로 산 팔이 길어 몇 번을 말아 올린 나이론 스웨터에 무릎이 반질반질한 바지를 입은 아이 하나가 노란 세상을 주워 모으고 있다. 한 잎 한 잎. 한 세상 한 세상 어느새 한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큰 은행잎 다발이 만들어지고 아이는 흡족한 듯 한참을 들여다본다. 시골의 고단한 긴 하루가 둥근 초가지붕의 그림자로 한길에 내려서는 시간, 다 이해한다는 듯 온종일 고개를 주억거리는 코스모스 길이 서서히 어두워져 가고 그 길 위로 꿈속 같은 가을이 빠져나가는 때, 그때 그 노란 다발은 세월이 아무리 가도 언제나 샛노랗다.

    김수환(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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