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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버리고 떠나기- 정이식 동화작가(200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 기사입력 : 2023-09-14 19: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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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휴일이면 모아두었던 분리수거 물품을 내놓는다. 이번엔 오래된 책을 챙겼다. 다 읽은 책은 짐만 된다. 두터운 사전을 먼저 버리고 지금은 소설책을 내다버린다.

    일전 어떤 수필집에서 읽은 글이 생각났다. 늙고 병들어 떠나기 전에 아이들 짐을 덜어주고자 그동안 모아온 많은 책을 기증할 곳을 찾았다. 그런데, 올해 발간된 책은 기증 받지만 그 외에는 필요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모두 버렸다. 그래도 혹시 필요한 누군가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져가라고 팻말까지 써놓았는데 1주일 뒤 수거차가 오며 나가보니 단 한 권도 가져가지 않았더라는. 참 서글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내 서재를 장식하고 있는 책들도 어쩌면 다 과시용이란 생각을 그때부터 나는 하게 되었다. ‘안 읽은 책으로만 서재를 채워라.’ 우연히 접한 개미의 작가 베르베르의 말이 내 이상과 닮아서 어린 시절부터 모아두었던 편지를 그래서 먼저 정리했다. 기록으로 남길 가족사는 산문으로 써서 사진과 함께 인터넷 가족모임방에 올리고 구닥다리 기록장과 사진들도 다 버렸다.

    그래도 칠순잔치 하고 사진은 찍어야지요. 하는 아이들 요구를 다음으로 나는 일축하였다. 많은 사진이 영상으로 저장되어 있으니 부러 돈 들여 찍을 필요는 없다. 생일은 당겨서도 한다니 설날 큰집에 차례지내고 온가족 다 모였을 때 점심을 우리가 쏘자. 거기서 합동사진도 찍자.

    어머니 떠나실 때 보니 가족모임 때의 사진을 찾아 어머니 얼굴만 빈소 앞에 영상으로 넣고, 그 사진 뽑아서 장지 갈 때 액자화해 주더라. 영정사진 그래서 별도로 찍을 필요가 없다. 설 명절에 폰으로 우리 형제자매 가족 다 같이 찍은 사진을 나는 지금도 내 칠순 사진으로 컴퓨터에, 폰에, 바탕화면으로 보관하고 있다. 한 박스의 책을 버리고 오니 한편으론 마음이 홀가분하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내일 퇴근하며 여전히 폐지수거장을 기웃거릴 것이고, 버려진 책을 보면 이미 읽은 책일지라도 또 가져올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버린 것보다 더 많이 책이 모아질 것이란 사실을.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이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버리고 떠나는 게 아니고 못 가지고 떠나기 때문이란다.

    정이식 동화작가(200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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