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30일 (화)
전체메뉴

[작가칼럼] 가을텃밭- 조경숙(수필가)

  • 기사입력 : 2023-11-16 19:51:35
  •   

  • 텃밭에 농익은 가을 햇살이 앉았다. 고춧대를 뽑은 자리에 양파와 마늘을 심는다. 흙을 다독이며 튼실한 수확을 기대한다.

    지난여름, 싱싱한 오방색 먹을거리로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던 텃밭은 변화무쌍하다.

    악보 없는 즉흥 교향곡을 들려주는지 춤을 추던 나비의 몸짓에도 선율이 느껴진다. 하얀 별꽃을 피운 자리에 뾰족뾰족 고추가 풋풋한 얼굴을 내밀었고, 비가 온 뒷날은 솜털 같은 가시를 밀어내고 통통한 오이가 자라났다. 보랏빛 가지는 복주머니를 닮았다. 수시로 김을 매어주니 풀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금방 딴 오이는 상큼하고 향긋하여 찬을 만들기 전에 먼저 한 입 베어 문다. 필요한 양념거리를 만들기 위해 후다닥 텃밭으로 달려가 고추 몇 개 따서 찌개에 송송 썰어 넣는다.

    신선한 맛에 길이 들었을까. 텃밭을 더 넓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삽자루를 쥐었다. 밭을 만들 곳은 잔디마당으로 텃밭과 연결된 곳이다. 온전히 내 손으로 만들고 싶어 남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두 발을 교대로 삽 어깨에 올려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시간의 더께로 굳어진 땅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다시 삽을 일직선으로 세우고 기합소리와 더불어 두 발을 올려 온몸의 힘을 기울였다. ‘뿌지직~’ 한 땀 한 땀 엿장수가 엿을 떼어내듯이 한 삽씩 떠올렸다. 잔디는 서로 얽혀 흙을 진득하게 안고 속살을 드러낸다.

    일일이 흙을 털어내고 뿌리는 걷어냈다. 굳은 시루떡 같은 흙이 쌀가루처럼 포슬포슬해졌다. 일주일 만에 마당 한 편이 번듯한 밭으로 완성되었다. 요령 없이 무턱대고 덤벼든 결과지만 흙 묻은 손을 툭툭 털고 나올 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출 수 없다.

    그냥 열리는 열매가 어디 있으랴.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토양의 힘을 돋게 하는 비료와 거름을 섞어 다시 뒤집었다. 좁은 고랑을 만들어 유채 꽃씨를 뿌렸다. 금방 노란 꽃이 필 것 같다. 양파며 시금치, 봄동을 심고 나니 그제야 다리가 후들거리고 대나무밭에 웅성거리는 바람처럼 팔이 윙윙 우는 것 같다.

    한 해 고추농사를 짓고는 얼마나 힘들었던지 농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유기농으로 짓는다며 약도 치지 않았으니 풀과의 전쟁이 연속이었다.

    경험과 정성 부족으로 노동의 대가보다 얼마 되지 않던 수확물은 마치 도둑맞은 것처럼 허탈했다. 시간과 공을 들인 품삯보다 마트에서 사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해야 하지 않을까. 손바닥만 한 밭 한 뙈기 일구는 일도 비지땀인데 쟁기 밀며 그 많은 농사를 지었던 부모님의 고단했을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흙에서 새로운 탄생과 창조를 일궈내는 농부의 위대함에도 새삼 경외감을 느낀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필요한 물건이 로켓배송으로 현관문까지 배달된다. 빛의 속도와 같은 급속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편리함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당 텃밭은 그때 어려움도 까맣게 잊게 하고 자연의 은혜와 교감할 수 있는 기쁨까지 안겨준다. 생명을 보듬어 키울 작은 텃밭에서 여문 씨를 뿌리며 또다시 봄을 기다린다.

    조경숙(수필가)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