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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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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가족- 문저온(시인)

  • 기사입력 : 2023-11-30 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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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특한 전시회를 보았다. 약속을 앞두고 시간이 뜨기도 했고, 늦가을 찬 바람 부는 저녁이라 한 줌의 온기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걷고 싶은 마음이 컸으므로 문화예술회관 앞마당을 천천히 거닐었다. 주차장 가로등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에프엠 방송이 흘러나와서 하루 일정을 마치고 어둑해진 공간을 음악으로 채워주고 있었다.

    유리문에 붙은 공연 포스터들을 구경하는데 전시장의 불빛과 입구의 화환들이 보였다. 밤의 불빛은 언제라도 반갑다. 남은 환대가 세상에 있다는 안도감. 그 불빛이 내게 약속된 것이 아니어도 그렇다. 플래카드에 적힌 전시 제목이 특이했는데, ‘박ㅇㅇ 가족 전시회’였다.

    너른 공간으로 들어서자 키를 넘는 서예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유화와 수채화도 나타난다. 그 곁에 커다란 자수 액자도 보인다. 작품 옆에 적힌 작가 소개가 신기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박** (막내 누이)’ ‘박## (셋째 누이)’. 그제야 가족 전시회라는 말이 이해된다. 이 댁에는 일단 네 명의 누이가 있다. 그리고 한 명의 남동생이 있으며, 그이가 바로 플래카드에 적힌 그 이름이구나.

    걸음을 옮기자 연필 소묘와 서각, 도자기 작품까지 있었다. 미술에 관한 한 모든 영역을 섭렵하셨구나, 이 가족은. 흥미로운 작가 소개는 계속되었는데, 희미한 기억에 기대자면 ‘최@@ (셋째 매부)’, ‘이&& (둘째 매부)’ 라는 식이었다. 형제자매들이 비슷한 취미와 재주를 가진 것은 그렇다 치고, 배우자들까지 이 거대한 전시에 합세하다니! 전시된 가족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 가족들을 알아가고 있으니, 이 전시야말로 ‘가족’이라는 제목에 걸맞았다.

    전시장 입구에서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으니 막내 누이, 셋째 누이, 둘째 누이 등등 가족 구성원을 아래에서부터 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중반을 지나자 드디어 ‘박ㅇㅇ’님의 회화 작품들이 보였다. 몇 걸음을 더 걷자, 나는 신기함에 더해 어떤 경외감까지 느끼게 되었는데, 나란히 걸린 서예 족자 옆의 작가 소개 때문이었다. ‘박ㅁㅁ (작은아버지)’, ‘박XX (아버지)’. 아, 이분들은 대체….

    그리고는 서예 족자 사이에 걸린 작은 인물화 앞에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수묵채색화인 듯한 그림에는 모란을 떠오르게 하는 검자줏빛을 배경으로 흰 한복 차림의 여성이 꼿꼿하게 의자에 앉아 계셨는데, 작품의 제목은 이러했다. ‘조모’. 작은아버지의 작품이었다. 아마도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놓고 그렸을 그 그림은 소박하고 고즈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진중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보는 사람을 겸허하게 만들었다. 나이 든 작은아버지가 그린 나이 든 할머니. 그립다는 말과 함께 역사라고 부르는 오랜 시간이 그림 밖으로 묻어나오는 듯했다.

    전시장을 돌아 나오면서 안내 데스크에서 여동생 넷을 둔 오빠 이야기를 들었다. 말 안 듣는 동생들 탓에 전시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을 거라고 웃으셨다. 그 곁에서 머리 희끗한 ‘오빠’가 함께 웃으셨다.

    팸플릿에 안내된 전시 소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을 함께 열심히 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 나아가서 음악이나 미술을 같이하면서, 보다 풍요롭고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싶기에, 우리 부모 형제들은 오랜 시간 뜻을 같이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미술 분야에서 열심히 즐기면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습니다. 이제 이런 좋은 뜻이 본보기가 되어, 널리 퍼져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문저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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