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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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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⑧ ‘해군’ 설항수씨

작전 중 쏟아지던 포탄 생생… 평생을 해군에 바친 ‘바다 사나이’

  • 기사입력 : 2024-04-17 22: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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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서 해방 후 아버지 고향 전북 돌아와
    인민군과 싸우려 나이 속이고 훈련소 입소
    국내 최초 수송함인 인천함 올라 군 생활

    동해 원산만·서해 연평도 등 전투물자 수송
    휴전 이후 미해군부대서 3등 기관사 근무
    표창 10여개 받았지만 대학 중퇴 아쉬워

    “전쟁 중인 나라들 보면 어린시절 떠올라
    그동안 가족에게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
    기록으로 남겨놔야 이런 아픔 다시 없을 것”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마음으로 인민군과 싸워야겠다고 생각해 군에 들어갔지. 뭣도 모르고….”

    ‘16세’, 설항수(90)씨가 처음으로 군에 들어가 전쟁을 겪었던 나이다. 전쟁이 끝났어도 그는 20살이 채 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다. 인민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해군에 입대해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그는 해군에 입대한 게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전쟁 때는 물자와 피란민을 수송하고, 휴전되어서도 해군과 미군에서 한평생을 바친 설항수씨. 그는 수십 년을 같이 산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줬다.

    설항수 6·25 참전유공자가 16살의 학도호국단 소속으로 참전, 대한민국 최초 수송함인 인천함(AKL-902)에 승선해 겪은 원산상륙작전, 전투 물자 수송, 피란민 후송 작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설항수 6·25 참전유공자가 16살의 학도호국단 소속으로 참전, 대한민국 최초 수송함인 인천함(AKL-902)에 승선해 겪은 원산상륙작전, 전투 물자 수송, 피란민 후송 작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제발 입대시켜 주십시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아버지 고향인 전북 순창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계속 살았기에 그는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고, 순창까지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알고 지냈던 동네 형님이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해 누가 부자이고, 일본에서 교육받았는지를 알려줬다. 당시 지역 유지였던 그의 아버지도 붙잡혀 옥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9월 이후 한국 전투경찰대가 마을로 들어와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인민군과 빨치산들은 산으로 숨어들어가 밤이면 주민들의 돼지와 닭은 물론이고 젊은 청년들도 잡아갔다. 인민군이 내려올 때면 마을 청년들은 곳곳으로 숨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 “너무 시골이라 북한이라는 나라와 전쟁하는 줄도 몰랐어. 그냥 인민군과 빨치산들 하고만 싸우는 줄 알았지. 그때 인민군이 말을 안 듣는다고 동네 형님 머리를 방망이로 내리쳤어. 닭 잡듯이 말이야. 그걸 숨어서 지켜보는데 정말 무서웠어.”

    설항수 6·25 참전유공자가 16살의 학도 호국단 소속으로 참전, 대한민국 최초 수송함인 인천함(AKL-902)에 승선해 겪은 백령도 상륙작전,전투 물자 수송, 북한 지역 피난민 후송 작전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설항수 6·25 참전유공자가 16살의 학도 호국단 소속으로 참전, 대한민국 최초 수송함인 인천함(AKL-902)에 승선해 겪은 백령도 상륙작전,전투 물자 수송, 북한 지역 피난민 후송 작전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해 9월 그가 다녔던 순창농림학교에 학도호국단 2개 중대를 모집했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그는 자원했고, 후방 지원부대에 배치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중대는 포항으로 배치됐는데 대다수 전사했다.

    육군 11사단 20연대가 담양, 순천 등지에서 무장공비 토벌할 때 그는 후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도왔다. 당시 그는 정식 군인이 아니었기에 탄약이나 식량 등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1951년 1월이 되어서야 전라도에서 공비들 활동이 뜸했어. 아직도 기억 나는 게 온 들판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어. 당시 남한 사람들이 흰 옷을 주로 입어서 온 밭이 하얗게 보였지.”

    그와 친구들은 정식으로 군에 입대해 인민군과 싸우자고 결의했다. 수소문 끝에 광주에 가면 육군으로 입대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10여 명과 떠났다. 하지만 광주에는 육군을 모집하고 있지 않았다. 군 관계자가 목포에서 해군을 모집하고 있으니 가보라고 알려줘 다시 길을 나섰다.

    목포에 도착한 그는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모병관이 나이가 너무 어리니 입대가 안 된다고 했다. 다행히 생년월일 고치면 된다고 해 34년생을 33년생으로 바꿔 입대했다. 이후 목포에서 배를 타고 진해로 가 해군 훈련소에 입소했다. 1951년 6월 4일, 그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1951년 6월 10일 설항수씨(맨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진해 해군 훈련소에서 찍은 단체 사진.
    1951년 6월 10일 설항수씨(맨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진해 해군 훈련소에서 찍은 단체 사진.
    1957년에 해군 전투함에 승선하던 시절의 설항수씨.
    1957년에 해군 전투함에 승선하던 시절의 설항수씨.

    ◇해군 최초 수송함 탑승= 그는 진해에서 훈련을 받은 뒤 대한민국 최초 수송함인 인천함(AKL-902)의 기관실에서 군 생활을 했다. 인천함은 1944년 건조된 미국 해군 경수송함을 한국 해군이 1951년 9월10일 인수해 1978년 4월1일까지 운용됐다. 그는 수송함을 타고 동해 원산만, 서해의 연평도, 백령도 등에서 상륙작전뿐만 아니라 전투 물자를 수송했다. 이후 북한 지역 피란민 후송 작전에도 투입됐다.

    1952년 5월 10일 인천함 승조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설항수씨는 세 번째 줄 오른쪽 여섯 번째에 있다.
    1952년 5월 10일 인천함 승조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설항수씨는 세 번째 줄 오른쪽 여섯 번째에 있다.

    그는 원산상륙작전 때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쟁 당시 함경남도 원산은 북한의 군사·교통 요충지로 얼지 않는 부동항과 비행장을 보유했다. 소련 군수품 지원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원산에는 정유공장, 철도 등 다양한 산업시설이 자리 잡았기에 아군이 점령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950년 10월 그가 탄 수송함도 작전에 투입됐다. 원산의 갈마반도에 배가 들어서자 인민군의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원산 해안에 접근하자 기뢰가 터져 해군 구축함들이 폭파됐다. 그는 미 해군 구축함이 기뢰에 맞아 두 동강이 났다고 회상했다. “육군과 다르게 배는 포 한 발만 맞아도 승조원 전원이 사망해. 당시 우리 배 지휘관들이 아주 유능해서 전략적으로 포를 피해 섬 뒤로 돌아가 이동했어.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분들의 전술에 감사해.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살아있지. 아니었으면 벌써 그때 죽었을 거야.”

    당시 수병들은 군함 안에서 주로 생활했다. 그는 어렸을 적에 집안에서 운영하는 방앗간 기계를 움직인 경험으로 기관실에서 근무했다. 하루 8시간을 근무했고, 전투 중일 때는 24시간 대기했다. 당시 수병들은 배에 탄 피란민들의 식사도 책임졌다. “전쟁 중이지만 이곳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 뭐라도 먹고살 길이 보인 거지. 나름 틈틈이 기계 공부도 하고 했어. 공부한 덕에 수병 중에서 성적이 좋았지.”

    ◇평생 바다 사나이로= 그는 1953년 인천함에서 휴전을 맞았다. 휴전 이후 그는 군에 남기로 결정하고 미 해군 부산항만방어부대에서 3등 기관사로 근무했다. 당시에는 휴전이 됐어도 북한 도발이 잦았다. 그는 해군 전투함에 탑승해 동해와 서해에서 해상경비 업무를 맡았다. 또 수시로 내려오는 간첩선을 나포하는 등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막아냈다.

    근무 성적과 영어 실력이 좋았던 그는 미 해군 군함을 인수하기 위해 미국을 두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군함 한 척당 인수 기간이 6개월 정도 걸렸고, 사병들까지 전부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아야 했다.

    설항수씨(오른쪽)가 1962년 미 해군 군함을 인수하기 위해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교육받던 시절.
    설항수씨(오른쪽)가 1962년 미 해군 군함을 인수하기 위해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교육받던 시절.

    그는 ‘대학 졸업장’을 취득하지 못한 게 평생 한이라고 했다. 사실 그는 휴전 이후 부산의 동아대 기계학과에 입학해 밤에 공부를 이어갔다. 적은 군인 월급에 각종 허드렛일을 하면서 등록금을 벌었다. 하지만 진해 해군기지로 발령 나면서 대학을 떠나야 했다. 그의 학력은 ‘대학 중퇴’이지만, 지금도 다시 공부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다.

    “난 사실 전쟁 중 해군에서 덕을 크게 봤어. 그래도 제일 아쉬운 것은 대학 졸업장 못 딴 거야. 지금도 너무 공부하고 싶어.”

    그는 1966년 해군 상사로 제대 후 미 육군성 극동지역전투물자수송단에 들어갔다. 이후 1974년까지 베트남전 물자를 대만, 일본 등지에서 수송했다. 1981년에는 다시 진해의 미 해군 함대지원단에 기술자 자격으로 들어가 미군 부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해군에 있으면서 10개가 넘는 표창을 수상했다. 그만큼 평생을 해군에 헌신했고, 봉사했다. 해군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영어와 일본어를 잘하기에 그는 은퇴 이후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진해를 안내하는 봉사도 했다. 그는 전쟁에서 살았다는 ‘감사함’을 봉사를 통해 갚고자 하고 있다.

    전쟁을 직접 겪은 그로서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충돌이 남 일 같지 않다. “각 국가의 나름대로 사정이 있지만, 전쟁의 아픔을 겪지 말았으면 해. 뉴스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이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

    1951년 6월 10일 전우들과 찍은 사진을 보며 활짝 웃고 있는 설항수씨.
    1951년 6월 10일 전우들과 찍은 사진을 보며 활짝 웃고 있는 설항수씨.

    그는 인터뷰 막바지 과거 군인 시절 자신의 사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사실 그가 말한 이야기는 가족들한테도 꺼내지 않았다. “오늘 말한 거는 내 마누라와 자식들도 몰랐어. 16살 나이에 논두렁에 숨어서 인민군에 맞아 죽는 이웃들을 보는 게 얼마나 비참해. 그래도 기록으로 남겨야 앞으로 이런 아픔이 없어지니 말하는 거야. 70년 넘게 혼자만 알던 이야기를 말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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