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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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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금요 칼럼] `노풍`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 기사입력 : 2002-05-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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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돌풍은 바람 없는 평지에서 거저 생기지는 않았다. 기존의 크고
    작은 바람을 아우르거나 삼키면서 한 줄기 큰 바람으로 뭉쳐올랐고 마침내
    는 지축까지 뒤흔들게 됐다. 그 크고 작은 바람이란 `김근태풍`, `김중권
    풍`, `이인제풍`, `박근혜풍` 등이며 최종적으로는 `이회창풍`의 함몰 여부
    가 관심을 모은다.

    노풍은 곧 김근태 김중권 이인제 박근혜씨 등의 알토란 같은 꿈과 포부
    를 접거나 꺾고서 형성됐으니 거기에는 다름아닌 김근태 김중권 이인제 박
    근혜씨 등의 억눌린 꿈과 사랑, 열정 등이 하나로 모인 셈이다. 파워 노풍
    은 이처럼 매우 파괴적이며 동시에 아주 창조적이다. 애오라지 `노무현풍`
    하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만약 그가 올 12월의 대통령선거에 당선
    된다면 진정 그것은 `한민족풍`이 돼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런 그가 뜨고 있을 때 같은 당의 김근태 의원은 울적하기만 하다. 지난
    해 4월 金의원은 대선출정식을 겸해 지지캠프인 `한반도재단` 창립기념식
    을 가졌고 여기에 참석한 盧후보는 축사에서 “김근태 최고위원은 이 땅 민
    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자 중심이며 저는 그 주변일 뿐”이라면서 “장차 민
    주화 세력은 단일화 돼야 하고, 이 단일화에 김위원이 중심이 된다면 힘껏
    돕겠다”고 말했다. 이 전후로도 그는 이따금 `단일화` 후보를 金의원에게
    양보할 수 있음을 직·간접으로 내비쳤다.

    그랬었는데 金의원의 국민지지율이 10%에도 못미치는 동안 그는 `노사모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의 적극적인 활약에 힘입어 어느새
    20% 이상의 지지율을 확보하면서 두 사람간의 지위도 역전됐고 마침내 金의
    원은 `아름다운 꼴찌`를 기억해 달라며 대선 후보경선에서 사퇴하게 됐다.

    盧후보의 처세술과 수사법도 예사 수준이 아니다. 그는,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으로 이름을 떨친 金의원에게 처음엔 굽히고 들어갔으
    나 나중엔 그 기반을 송두리째 나꿔챘다. 본래 金의원측에서는 盧후보를 얕
    본 것도 있다. 사실 민주화운동 세력 간의 후보단일화 논의에서 여야를 통
    틀어서도 金의원을 압도할 사람은 없다는 게 당시의 정황이기도 했다.

    학력이 상고인 盧후보는 학생운동 명망가 출신인 金의원에게는 `양보
    설`로 겸양의 미덕을 발휘했으나 고시 출신으로 막강의 지지율 1위를 자랑
    하는 `이인제 대세론`에는 과감히 `노무현 대안론`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누가 더 대중성이 앞서느냐는 게임인데 결국 그는 `대세론`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그가 지난달 30일 김영삼 전대통령(YS)을 방문하고 “민주화 세력을 복원
    하겠다”며 연방 머리를 꾸벅인 것은 다름아닌 `신민주대연합론`에 따른 의
    지였다. 그런데 이 `연합론`의 주창자는 김근태 의원이다. 盧후보가 `김근
    태풍`을 아우르면서 그 핵심이던 `연합론`까지를 포용하게 된 것이다. 그
    를 만난 YS는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따라 `노무현發(발) 정계개편
    론`이기도 한 `연합론`이 YS의 `재가`를 받은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기
    도 한다.

    노풍의 다른 한 축인 `영남후보론`도 본래 그가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첫 제안자는 민주당 김중권 전대표였다. 金전대표는 “호남의 지지를 받는
    영남 출신의 보수성향 후보여야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고 믿었다.
    盧후보는 곧 진보성향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나 金전대표와 박근혜 의원
    까지 `노무현풍`에 휩싸여 각각 빛을 잃거나 빛이 일부 바랜 게 사실이다.
    노풍은 곧 `신민주대연합론`과 `영남후보론`을 흡수통합하고 `이인제 대세
    론`과 `이회창 대세론`을 일부 잠식하면서 수직상승했다.

    노풍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도 특징의 하나이다. 일례를 들면 그
    가 YS의 통일민주당에 몸담았다가 90년 YS의 3당합당에는 따라가지 않았다
    든지 또 DJ와 함께 통합민주당에 있으면서 95년 DJ의 국민회의 창당에는 따
    라가지 않은 점 등이다. 이러했던 그가 지금 또 변신을 시도하는 중이다.
    즉, 민주당 대통령후보이나 이에 연연하지 않고, 즉 후보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캐치프레이즈인 `개혁과 통합`에 따른 신정치의 외연을
    보다 넓혀나가겠다고 한다. 정계개편론이 그것인데, 여기서도 우리는 그의
    `공격정치`, `변형정치`의 전형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는 끊임없는 자아부정을 통해 또 다른 자아창출을 하려는지 모
    른다. 우리가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자아부정이 자아창
    출보다도 훨씬 더 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늘 새롭게 태어난
    다`는 것일까. 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 본다. /허도학(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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