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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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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다시 보는 조조

  • 기사입력 : 2002-11-08 00:00:00
  •   

  • 사실 한 평생을 위선도 없이 살아가기란 어렵다. 때로는 거짓말을 해야
    하고, 때로는 거짓 몸짓도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얼마나 이를 능숙하게 또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뇌를 해 본 적이 있을까. 아마도 삼국지
    를 읽은 사람이라면 조조를 쉽게 떠올리고 조조의 지혜와 용기를 빌렸으면
    하지 않았을까 한다. 조조야말로 모질 때는 간웅이나, 어질 때는 영웅이었
    다. 그의 얼굴 한면이 울고 있다면 다른 한쪽은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극과
    극을 오갔으니, 이런 능대능소하고 선·악을 자유로 하는 조조를 누구라도
    조금쯤은 닮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가장 조조다운 말이 하나 있다. “차라리 내가 세상에 빚을 지더라도(寧
    叫我負天下), 세상이 나에게 빚을 지게 할 수는 없다(不叫天下負我)”는 거
    였다. 즉 자기가 세상사람을 속이고 배반하고 죄를 질 값에 세상사람이 자
    기에게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겠다는 얘기다. 이는 그의 부친 친구
    인 여백사 일가족을 그가 오해 끝에 살해한 직후 내뱉은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죽인 것은 여백사 일가가 아니라 천하(세상)라는 얘긴가. 이렇듯 그
    는 자신을 천하와 맞바꾸는, 그보다 더 높게 값을 매기고 있었다.

    이러했기에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조조를 간교·간사한 영웅이라 질
    타했는지 모른다. 조조가 있은 지 1천300년 뒤에 나온 명대 나관중은 삼국
    지를 쓰면서 그 많은 사람을 죄다 이름으로 호칭했지만 딱 두 사람, 유비
    와 제갈량만큼은 각각 현덕, 공명이란 자(字)로 불렀다. 그가 보는 삼국의
    정통성은 유비와 제갈량이 이끄는 촉(蜀)에 있었지, 조조가 이끄는 위(魏)
    가 아니었다.

    나관중의 이런 삼국관에 반기를 든 것이 조조에 대한 재평가라고 보면 거
    의 틀림이 없다. 특히 모택동의 등장 이후 그를 조조와 관련짓는 시도가 활
    발했다. 둘 다 뛰어난 군사전략가이면서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문인이란
    점을 앞세운 것이다.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이 본격화하면서 조조 재평가
    는 가히 봇물이 터짐을 만나는 격이다. 능률과 실질을 앞세운 조조의 법치
    주의가 유비의 힘없는 덕치주의를 누른, 새로운 사회발전의 동력이란 얘기
    다.

    때를 같이 하여 우리 사회에도 변화가 일었다. 흥부가 배척되면서 놀부
    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즉 착한 흥부가 게으른 흥부로, 욕심 많은
    놀부가 부지런한 놀부로 각각 변화했다. 놀부처럼 가진 게 없거나 궁하면
    어디 가서 빼앗아 오든가 해야지, 흥부같이 꾸러간다는 것은 남의 동정이
    나 바라는 나약함의 표본일 뿐이었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나온 `늑대의 법치`라는 책에서는 중국인이 늑대의
    강인한 생존력을 닮아야 함이 강조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을 학문적으로도
    뒷받침한 게 소위 `후흑학(厚黑學)`이었다. `후`란 얼굴이 두껍고 `흑`은
    마음이 검다는 것으로 둘 다 `나쁜` 뜻이다. 그런데 유비는 `후`하나 `
    흑`하지 못해 반만 나쁜 반면, 조조는 모두 `후흑`해 완전히 나빴다. 유비
    가 후덕한 위선자라면 조조는 그런 위선을 뛰어넘은 간웅, 공개된 난폭자라
    고 할까. 유비는 곧 조조처럼 모질어야 할 때 모질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조에 따라 붙는 간웅이란 것도 그 자신의 천하 경영상 불가피
    한 선택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나관중에 의해 `간웅 조
    조`와 `영웅 조조`로 나뉘어 선악이 분명했던 경계가 지금은 모호한 것이
    다. 이렇게 되면 유비는 왜 간웅이지 못했느냐고 물어야 할까.

    흔히 조조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고 한다. 처세술의 극치가 조조에서 묻어
    난다는 얘긴데 일고의 가치는 있다고 본다. 특히 학창시절을 보내고 사회
    에 첫발을 들여놓은 직장인의 경우, 때때로 조금은 악해지고 싶다면 조조
    를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나약함이란 어떤 경우든 젊은이의 표상이
    아니니까. /허도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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