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30일 (목)
전체메뉴

[경남문화유산 답사기] 마산 ⑦

  • 기사입력 : 2003-03-07 00:00:00
  •   

  • 진동리 2호 지석묘에서 면소재지 방향으로 200m쯤 내려오면 진동면 사무
    소가 있다. 진동면 사무소 부근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244호 진해현 관아
    및 관사유지(官舍遺址)가 있다.

    진해현 관아 및 객사는 조선 순조 32년(1832) 진해현감 이영모(李寧模)
    가 건립하였다. 동헌은 현감이 공사를 집행하던 곳이며 객사는 왕의 전패
    (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 각 고을의 객사에 ‘殿’자를 새겨 세운
    것으로, 정조(正朝)·동지·탄일(誕日)에 그 고장의 관원이 배례하여 경의
    를 표하는 정성을 나타내었음)를 모시고 배례(拜禮: 절하는 예)하며 조정에
    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원래 동헌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군령을 출납하는 사령청과 앞쪽에는 말
    을 사육하는 마방과 지방의 형사를 담당하는 형방소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
    으나 지금은 20년 전에 들어선 면사무소 건물이 동헌옆에 자리잡고 있다.

    동헌은 앞면 7칸, 옆면 3칸의 일자형 건물이며 1981년 9월과 1982년 7월
    에 각각 두차례 보수했다. 객사는 정면 11칸, 측면 3칸으로 75평의 규모인
    솟을지붕의 목조건물이었으나 삼진중학교 교사(校舍)로 사용하던 중 1983
    년 5월2일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어 기단(基壇)과 주초석(柱礎石) 등만 남아
    있다.

    삼진중학교 교문 입구 사주문(四柱門) 앞에는 돌비석 사이에 철비석까지
    역대 현감의 공덕비 16기가 즐비하게 서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관들이 떠
    날때 선정비를 세우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대개 고을 향리들이
    주도하여 이루어졌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아
    갔다.

    진해현 관아 및 관사유지를 뒤로 하고 광암 방향으로 나서면 좁은 골목
    길 양쪽으로 옹기종기 시장 좌판들이 모여있다. 작은 배로 직접 바다에서
    잡았다는 해산물을 사라며 옷깃을 잡는 할머니의 정겨운 손길도 있고, 양
    지 바른 언덕에서 금방 캐온 쑥이며 나물들이 봄 냄새를 물씬 풍긴다.

    시장을 벗어나 국도 14번을 따라 통영방향으로 잠시 나가면 진북면과 경
    계지점인 진동면 사동리 237번지에 삼진 의거(義擧)를 기리는 8의사 창의탑
    (彰義塔)이 있다. 삼진의거는 진전·진북·진동면의 3개 면에서 1919년 4월
    3일에 일어난 연합시위를 일컫는 말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긍지
    와 자부심을 주는 사건이다. 이 의거는 삼일 독립운동 중 우리나라 각지에
    서 일어난 을미년(乙未年) 4대의거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치열했다.

    창의탑의 비문에는 『1919년 4월4일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
    양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의 8의사는 수천 군중의 앞장에 서서 우렁
    찬 조국 독립만세를 외치다 왜병의 총탄에 무참히 쓰러졌다』라고 적혀 있
    다.

    이 위대한 삼진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1963년 10월에 진동면 사동리 현장
    에 삼진 면민들의 손에 의해 창의탑이 세워졌고, 삼진의거의 진원지인 진전
    면 양촌리 양지바른 산자락에는 8의사 묘역이 조성되어 뜻을 기리고 있다.

    8의사 창의탑에 잠시 묵념을 하고 8의사 도로를 따라 고현리 방향으로 발
    길을 옮기다 왼쪽으로 고개 돌리면 넓게 바다가 메워지는 간척지가 보인
    다. 매립이 되어 간척지가 되기 전에는 하천 주변에 갈대가 우거져 가을이
    면 데이트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진동면 고현리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가는 길목에 우산초등학교가 있다.
    우산초등학교 교문 입구 왼쪽 화단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석불좌상이 사
    철나무 사이에 있다. 보호시설이 없이 초라하게 방치되고 있다. 좌대(座臺)
    는 흙 속에 묻혀 있으며 작은 체구의 석불(石佛)은 오른팔과 왼쪽 어깨 부
    분, 목 위 부분이 파손되었다.

    옷의 주름은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며, 왼쪽 가슴 부분에 매듭을 지었다.
    결가부좌한 자세는 왼발을 바깥으로 내었고, 발가락은 전체적으로 보아 세
    부묘사를 생략하여 둔한 느낌을 준다. 몸통에 비해 결가부좌한 자세가 풍만
    하여 전체 조화는 떨어지는 편이다. /심재근(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 회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