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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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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시인이 찾은 함양 화림동 계곡

  • 기사입력 : 2005-07-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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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꿀맛같은 낮잠 꿈만같은 휴식


      세상에 황홀한 것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술이요 섹스요 달빛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달콤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요즘 같은 여름철에 최고로 달콤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한낮의 꿀맛 같은 낮잠이 아닐까. 문 꼭꼭 걸어 잠그고 에어컨 틀어놓은 방에서가 아니라 발밑으로는 계곡물이 흘러가고 머리맡에선 산매미가 울어대는 자연에서의 낮잠……!

      여름 안의를 지나 서하에 가서 우리는 그 낮잠을 즐길 수 있다. 화림동(花林洞)의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마룻바닥이 그 낮잠을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등줄기가 서늘하기로 따지자면야 화림동은 골 깊은 지리산에 반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후텁지근한 더위가 적당히 방해하는 한낮의 낮잠! 그것이 화림동의 멋이고 장점이기 때문이다.

      화림동의 정자는 그렇게 세속과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그 정자에서 즐기는 낮잠은 시골마을 한옥 마루에서 라디오 틀어놓고 즐기는 낮잠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깔끔 떨려거든 얼씬도 마라!

      후텁지근 한낮더위 즐길 줄 아는 자

      막걸리 한사발에 김치의 낭만 아는 자

      나리꽃 한송이 기쁨 아는 자여 오라

      소음에 찌든 도시인이나 소심한 사람들은 아마도 화림동 정자에 가서 쉬이 낮잠에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낮잠을 자는 동안 백년 묵은 구렁이 한 마리가 슬슬 당신의 목덜미를 지나갈지도 모르고. 정자의 기둥 아래 사는 지퍼처럼 많은 발이 달린 지네가 스멀스멀 당신의 옷 속으로 파고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허리 잘록한 개미 한 마리가 살금살금 당신의 팔뚝을 타고 올라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림동에선 그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어야 잘 수 있다. 잠결에 손바닥으로 그것들을 탁 대수롭지 않게 때려잡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 <사진위>화림동 계곡 거연정

      그것도 그렇고 화림동에선 시끄럽도록 울어대는 산매미 소리를 자장가로 들을 수 있어야 단잠을 잘 수 있다. 게다가 인가가 가까이 있으므로 탈탈탈탈 일 나가는 경운기 소리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맞다. 육십령으로 올라가는 자동차의 엔진소리도 정답게 들을 수 있어야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화림동의 정자에선 후텁지근한 지열(地熱)을 즐길 수 있어야 단잠을 잘 수 있다. 여름이 절정으로 치달으면 화림동의 숲도 계곡물도 태양으로 데워진다. 널찍널찍한 암반들은 맨발로 디딜 수 없을 만치 뜨거워진다. 그것이 화림동의 멋이고 맛이다.<사진>유홍준시인이 함양 화림동 계곡을 바라보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화림동의 정자에서 단잠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은 이미 그 구실을 거의 상실한 그늘 아래.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고구마 줄기 까는 시골 아낙의 인생을 어느 정도 알아야 그 자격이 있다. 낫으로 스윽스윽 발뒤꿈치 굳은살을 깎아내는 주름투성이 농부의 삶을 조금은 알아야 그 자격이 있다. 차마 일어나기도 싫어 발가락으로 선풍기 바람을 조정하는 게으름을 알아야 자격이 있다.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젓가락이 아닌 손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먹을 수 있어야 그 자격이 있다. 

      머릿속에 숫자가 가득 든 당신은 자격이 없다. 모든 산술적 계산을 버려야 비로소 화림동 정자에서 잘 자격이 주어진다. 깔끔을 떨려거든 아예 얼씬도 않는 게 좋다. 계곡 주변에 늘어선 낙락장송도 좋지만 보일 듯 말 듯 숨어 핀 나리꽃 한 송이가 주는 소슬한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어야 한다. 습한 벼논 두렁에 핀 달개비꽃 한 송이가 풍기는 남빛의 미묘함에 설렐 수 있어야 한다. 나태하고 게으르고 세상사는 일에 의욕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당신은 자격이 없다. 이 첨단문명의 시대에 누가 이토록 고루하고 남루한 방식의 낮잠 따위를 좋아한단 말인가. 보다 즐겁고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과 조건들을 구비한 휴양지들이 여기저기서 우리를 부른다.

      아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오히려 그러므로 화림동 정자에서 드는 단잠은 소중하고 귀하다. 정자에서 자는 낮잠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낮잠 자는 그 몇 시간은 당신이 정자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에어컨 아래에서 자는 낮잠은 시체냉동실에서 자는 잠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자. 최신식 풀장과 물썰매가 있는 특급 휴양호텔과 겨우겨우 탁족에 시금털털한 김치 한 보시기와 막걸리가 있는 낡디낡은 정자가 있다.
    찌는 듯한 올 여름. 당신은 어디로 떠날 것인가?<사진>군가정

      ▲유홍준 시인은 1962년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진주에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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