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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창원 용지공원의 석조물

  • 기사입력 : 2007-05-23 0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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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 전 창원으로 연구소를 옮긴 뒤. 가끔 산책을 위해 용지공원을 찾는다. 도심 한가운데 이처럼 좋은 공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창원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용지공원에는 많은 석조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에서 두 개의 석조물은 불교문화재다. 하나는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이고. 다른 하나는 불모산삼층석탑이다.

    전자의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는 진짜가 아니고 복제품이다. 이 복제탑비는 1990년 1월 16일 창원시에서 세운 것이다. 원래의 탑비(塔碑)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봉림사를 개산한 진경대사의 탑과 비로. 탑은 경명왕 7년(923)에. 비는 경애왕 1년(924)에 창원시 봉림동 176 봉림사에 안치되었던 것을 1919년 3월 일본인들이 서울 경복궁 경내로 이건(移建)하였다. 이 탑은 보물 362호. 비는 363호로 지정되었다. 이것을 창원시에서 그 원형대로 복제하여 많은 시민들이 우리의 보물급 문화재를 직접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후자의 불모산삼층석탑은 창원시 천선동 산 203 불모산 기슭에 도괴(倒壞)되어 흩어져 있던 것을 창원시에서 원형으로 복원하여 1989년 1월 30일 이곳 용지공원에 세우게 된 것이다. 이처럼 창원시에서 시민들을 위해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복제 혹은 복원하여 공원에 전시한 것은 매우 잘한 것 같다.

    그런데 공원 한곳에는 이 고장에 부임했던 관리들의 송덕비(頌德碑)를 옮겨 질서정연하게 세워 놓았다. 어느 날 나는 송덕비의 내용이 궁금하여 처음부터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사 신후 명식 이교불망비(府使申侯命式移校不忘碑)’를 읽어 내려 가다가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 훌륭하신 우리 원님이여!/ 고을 다스림에 갖출 자질 다 지니셨네./ 절을 헐어 치워버리고/ 향교를 옮기어 지으셨다./ 선비사회에 큰 공을 이루었고/ 고장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었네./ 이런 까닭에 이를 돌에 새겨두나니/ 영원히 그 은혜 잊지 않으리이다./ 무자(1708)년 2월 일에 세우다.”
    이 비문의 내용은 신명식(申命式)이라는 부사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사찰을 헐어버리고 그곳에 향교를 건립하였는데.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儒林)의 선비들이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조선시대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500년 동안 불교가 탄압받았다고 배웠는데.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비문이었다.

    불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은 불법을 파괴시킨 훼불자(毁佛者)다. 그런데 당시의 선비들이 이 사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불망비를 세운 것이었다. 불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 비문을 부수어 버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기로 하였다. 불교도들이 이 비문을 통해 호법(護法)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역사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마성스님(창원 팔리문헌연구소장·동국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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