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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문화 <17> 경남 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정진호씨

  • 기사입력 : 2007-08-06 0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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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끝서 살아나는 전통가구 숨결


    중국집 철가방을 들고 자장면을 배달하던 한 소년이 우연한 계기로 목공사에 취업. 나무를 연금술사처럼 자유롭게 다루는 장인이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40여년 한눈 팔지 않고 소목장(小木匠) 외길을 걸어 2004년도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감격도 맛봤다.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단원공방에서 기품있는 전통가구를 재현해내고 있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정진호(56) 선생.
    가옥이나 집 등 건축물을 짓는 대목장(大木匠)과는 달리. 소목장은 장롱이나 궤함. 이불장. 버선장 등 세간살이를 만드는 목공예인이다.

    그는 하나의 전통가구를 재현하기 위해 괘목이라 부르는 느티나무 등 다양한 목재를 전국을 돌며 수집하고. 10년여에 걸친 건조기간을 거쳐 톱질과 대패질. 조각칼로 깎고 끼워맞추기를 되풀이하는 인고의 과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합천 해인사의 3개 가마(軟)와 부산 광명사·광양 삼광사 법단 등을 그의 손으로 완성했고. 불교미술대전과 전통공예대전 등에 작품을 출품. 수많은 입상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공방에서 수제자와 함께 고려·조선가구 재현에 땀을 쏟고 있다.

    ■초등 졸업후 가난 벗으려 상경

    1952년. 경북 포항 인근 영일군 대송면 빈농의 6남매(5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난 정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빈한한 형편 탓에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대로 놀고 있다가는 남의 집 머슴살이로 전락할 것이 뻔했다.

    “당시 제가 철이 일찍 났었나 봅니다. 열댓 살 무렵이었는데도 빈둥빈둥 놀면서 허송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같은 또래의 5촌 아저씨와 의기투합.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혀 보자며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어요.”

    1967년 소년기가 채 가시지 않은 15살 어린 나이에 상경한 정씨는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동대문운동장 옆 막노동 손수레 집결 공터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면서 가혹한 세파를 온 몸으로 느꼈다. 틈틈이 일거리를 찾았으나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중국집 사장의 눈에 띄었고 배고픔만이라도 해결해보자는 심산으로 식당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철가방을 들고 자장면과 우동을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다.

    정씨는 배달을 오가며 을지로 도로변에 있는 목조각(스카시) 공장을 관심있게 보게 된다.

    “배달일로 세월을 보내기보다는 전문분야인 목공예를 배우면 장래성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장을 만나 취업 희망을 타진했더니 저를 잘 봤던지 선뜻 받아 주셨어요. 그때는 정말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죠. 당시만해도 기술은 아무에게나 가르쳐주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일이 필생의 업이 될 줄이야.

    목공사에서 약 한 달 가량 일을 하고 있는데 사장이 제법 규모가 큰 용두동에 있는 신세계공예사를 소개해 주었다. 일터를 옮겨 몇달 간 도안복사 작업 등을 하다가 점차 칼갈기 등 밑일과 조각작업을 한 3년간 하다보니 제법 숙련공이 되었다.

    “이곳에서 문양조각을 하는 일 외에도 목단과 장미. 도안조각. 나아가 입체 용조각. 호랑이 조각을 하면서 점차 실력이 느는 걸 스스로 느꼈어요. 그러자 더 큰 회사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맞춰 성동구 화양리 효창흥업회사에 취직이 됐다. 이곳에서는 섬세한 불단조각을 배우고 고급 기법을 5년동안 연마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도 했다.

    ■당대 명장들로부터 기술 전수

    서울에서 8년여 목조각 공장을 옮겨가며 기술을 연마하던 가운데 성년이 되었고 병역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고향 포항으로 내려와야 했다. 고향집에 와서도 목조각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것을 지나가던 어떤 장사꾼이 보고 작품 수준에 감탄. 사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전통(箭筒: 화살통)을 만드는 중요무형문화재 ‘전통장’ 김동학 선생의 동생이었지요.”
    그는 이것이 인연이 돼 김동학씨 밑에서 20일간 실험작품을 해보이고 실력을 인정받아 진주의 김동진 소목장을 소개받는다.

    이때가 그의 나이 26세 되던 1976년 여름이었다.

    “당시만 해도 공방에서는 개인도구를 중히 여겼지요. 가까스로 개인도구를 마련해 밤늦게까지 대패를 밀고 당기는 연습을 몇 달간 계속했어요.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크기가 작은 경상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고 여기서 목조각과 전통소목의 접목을 통해 완벽한 소목공예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동진 문하에서 2년여 소목일을 배우던 중 스승이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마지막 은사가 된 소목장 무형문화재 정돈산 선생 문하에서 19년간 소목의 정수를 꼼꼼하게 익혔다.

    그의 순탄치 않은 인생역정이 오히려 목조각과 가구 짜는 일까지 모두 익힐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그래서 그는 남의 손 빌리지 않고 가구의 전 공정을 혼자 수행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작은 아들에게 가업 승계”

    ‘단원공방’이라는 이름은 박달나무 동산이라는 뜻으로 그가 잘 아는 스님이 지어주었다. 정 선생은 불교와도 인연이 많은데 제2의 고향이 된 진주에 온 후 연화사의 좌대를 만들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일했고 호국사 삼장법사 위패도 만들었다.

    최근들어 고가구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지만 소목장 일이 생업으로서는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전통가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괘목을 10년 이상 건조시키고 여러 공정을 거쳐야 되는데 그 수고에 비해 받는 대가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지요. 사실상 재료비와 품값을 제하면 남는 게 없습니다.”

    오로지 수작업으로 장기간 만들어야 되고 대량생산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대를 마감하기가 안타까워 그는 대학생인 둘째아들 연오(27)씨에게 기능을 전수하고 있다. 아들도 흔쾌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다.

    “못 하나 박지 않고 수백 년을 끄떡없이 견뎌내는 가구를 만들어낸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전통을 계승해 더욱 발전시키는 책임은 우리 후세들에게 있다고 봅니다.”

    대팻밥과 미세톱밥이 가득한 작업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장인의 고집과 예술인의 아름다움이 함께 배어 나왔다. 이상목기자 sm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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