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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25·끝) 작곡가 이상근과 진주

  • 기사입력 : 2007-10-15 09: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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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운 '새야 새야' 부활의 날갯짓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청포장수 울고 간다’.
    한국 근대사의 큰 전환점을 가져온 동학혁명의 두령 전봉준을 두고 불린 전래동요인 ‘새야 새야’이다.

    우리의 전래 동요 중 특이한 서정적 가락으로 우리 가슴에 파고든 이 노래가 진주 출신의 고(故)이상근(1922~2000·전 부산대 교수)씨가 1947년 곡을 붙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진주·마산·부산을 오가며 지역에 뿌리를 둔 한국의 현대음악을 주도한 대표적 1세대 작곡가로서 영남의 작곡계가 서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한 영남음악의 거목으로 통한다.

    지금의 부산이 경상남도였을 때, 최초로 ‘도민의 노래’를 작곡하고, 관현악 작품이 흔치 않던 1958년에 한국 최초의 관현악 작곡발표회를 연 것도 그였다. 또 지방 작곡가로서 제2회 대한민국 작곡상 수상과 KBS교향악단(1998년까지)이 가장 많이 연주한 한국 작곡가의 곡도 이상근이었다면, 이는 한국 음악사에서 그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대변해준다.

    특히 18세 때 가곡 ‘해곡’을 첫 작품으로 마지막 작품인 교향곡 6번까지 독주곡 실내악 가곡 합창 오페라 교향곡 등 전 분야에서 122곡을 남기면서도 한국적인 가락에 현대적인 화음을 일관되게 추구해 한국의 ‘차이코프스키’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이같은 음악적 밑바탕에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유성기에 흘러나오던 클래식 음악에 취해 스스로 음악가의 길을 찾아나서도록 한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인 진주가 항상 자리한다.

    가난과 배고픔 속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잔잔히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면서 음악가로서의 투지를 다졌던 이상근. 흐르는 세월 속에 그의 모습은 잊혀져가고 있지만 그가 남긴 뛰어난 작품들은 진주에서 서서히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 부친의 음악적 영향 받아= 사실 지역에서 이상근씨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태어나 30세 때까지는 진주(마산 포함)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그 이후에는 줄곧 부산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진주에서 독학으로 현대음악에 입문해서 큰길로 나가는 발판을 다진 후 본격적인 활동은 부산에서 하면서 오히려 영남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셈이다.

    기자는 진주에서 이상근씨의 흔적을 찾기 위해 지난 5일 김창재(진주시립합창단 지휘자·계명대 작곡과 교수)씨와 함께 생가를 먼저 찾아 나섰다.

    생가는 진주IC에서 내린 후 합동주차장 방향으로 가서 중앙로터리를 거쳐 진주중학교 앞에서 우회전해서 100m 들어간 지점에 있었다(봉래동 176). 그가 1953년도 부산으로 가기 전까지 살았다고 하는 이 생가는 원래 이층 양옥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인이 바뀐 후 현재는 단층 한 채와 2층 양옥집 한 채 등 두 채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의 생가였다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세월의 흐름속에 묻혀져 있었다.

    이상근은 1922년 이곳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부친은 서울 유학을 마친 언론인으로서 중앙일간지의 진주지국을 경영하는 한편 기자로 활동했는데 음악을 무척 즐겨서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탔고 축음기 음악감상도 일상적으로 하는 음악 애호가였다고 한다.

    SP음반을 통해서 어린 이상근은 일찍부터 통속 명곡과 당대 국창들의 소리를 익혔고, 집 근처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가에도 제법 익숙해지는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좋은 음악적 환경에서 자란 셈이다. 진주시는 그의 생가 일대인 합동주차장~장전놀이터~봉래초등학교에 이르는 1.1㎞를 지난해 ‘상근로’로 지정했다.

     쥒독학으로 작곡공부= 그가 작곡가로서 꿈을 키웠던 진주 제1공립보통학교(6년제·현재 진주중앙초등학교)와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5년제·진주중고교)로 발길을 돌렸다.
     이상근의 회고에 의하면 별다른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지 않은 이들 학교를 다닐 당시 음악사정은 황무지였다. 초등과정에선 오르간에 맞추어 창가를 배운 정도였고 중학과정에선 음악은 주당 1시간, 2학년까지 수업을 받았는데 생물교사나 체육교사가 겸임했다. 3학년 때부터는 일제의 중국본토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교련이 강화되고 교복차림에 군용 배낭과 전투모에 각반을 차야 했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흐름속에 중학시절 집의 가세마저 기울어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촉석루와 남강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남강을 바라보면서 어려움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어려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음악을 택하게 된다.
     닥치는 대로 악보와 음악서적을 탐독했고, 그때 사정으로는 어려웠던 고전명곡 감상에도 전력을 다했다. 당시 고전파와 낭만주의에 심취했던 것과 달리 드뷔시, 라벨 등 프랑스 인상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이론과 화성학, 대위법, 술페쥬 등 작곡할 수 있는 기초는 혼자 독학으로 익혀나갔고, 피아노서법은 대가들의 작품에서 눈요기로 익혔다. 이렇게 해서 그는 5선지에 가곡 정도는 기록할 수 있는 실력을 쌓게되고 18세 때 ‘해곡(양주동 시)’ 등 3곡을 처음으로 작곡한다.

    ■ 교사로서 작곡 본격화= 진주의 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할 수단으로 초등학교 교사를 지원하고 그 첫 부임지가 진주 제2공립 보통학교(현재 봉래초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당시 그의 생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현재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2년여를 근무한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살리기 위해 일본 도쿄 동양음악학교(도쿄음악대학)에 1년을 수학하다가 귀국해 진주 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해방이 되자 진주중학교로 옮기고 진주농고의 음악교사를 겸임하게 된다.

    본격적인 작곡활동은 1946년 11월 마산여고 음악교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작된다. 1947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여성 합창곡으로 만들어 문교부가 공모한 중등음악교재에 제출해 입상하면서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48년에는 진주고보 시설 쓴 가곡 ‘해곡’을 문교부 공모에 응모해서 이 역시 입상한다. 1947년엔 또 최초의 기악곡으로서 바이올린 소나티네를 역시 문교부 전국 콩쿠르에 출품하여 입상함으로써 창작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49년 3월에는 진주사범으로 자리를 옮겨 1년간 머물면서 김춘수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 ‘가을 저녁의 시’와 현악4중주곡 제1번을 작곡하면서 깊어진 그의 작품세계를 선보인다. 6·25로 인해 1950년 10월 다시 마산여고로 돌아온 그는 같은 학교 영어교사였던 김세익(전 이화여대 도서관장)이 쓴 ‘석류’와 ‘딸기’에 합창곡을 붙인다.

    이어 1951년 11월25일 마산 ‘부림극장’에서 제1회 이상근 작곡 발표회를 열고, 52년 12월6일에 임시수도가 있던 부산 부민동 이화여대 강당에서 제2회 이상근 작곡발표회를 가지면서 중앙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1953년에는 부산으로 가 부산고교와 부산교대, 부산대 등을 거치면서 교향곡시리즈 등 기악곡과 연가곡 ‘아가’와 관현악작품 ‘조우시리즈’, 창작오페라, 칸타타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다.

    ■ 고향에서 싹트는 그의 음악혼= 고향에서 그의 존재는 잊히고 있지만 음악은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진주시는 지난 2003년도부터 이상근 선생을 비롯한 진주 출신 작곡가들의 가곡 및 합창곡을 집대성하여 진주가곡집 ‘남강의 노래’와 합창곡집 ‘논개의 혼’을 펴내 전국에 알렸다. 지난해에는 이상근 선생이 6·25전쟁 중에 작곡했으나 분실한 칸타타 ‘보병과 더불어(유치환 시)’를 53년 만에 발굴하여 무대에 올리고 올 6월에도 그를 기리는 음악의 밤이 마련돼, 다양한 작품이 연주됐다.

    한국 작곡계에도 그의 뛰어난 음악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려는 노력들이 세미나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한 시대를 앞서간 그의 고급스럽고 훌륭한 음악을 있게 한 진주의 남강과 촉석루, 그리고 과거부터 이 땅에 무수히 잠재해 온 시와 전통의 음률 속에서 이제 그의 음악도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명용기자 my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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