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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문화] (21) 통영 승전무 예능보유자 한정자씨

승전무 지킨 50년 춤인생

  • 기사입력 : 2008-01-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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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영 승전무(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예능보유자 한정자(67·승전무보존회장)씨는 천생 춤꾼이다.

    자칫 역사 속으로 묻힐 뻔했던 승전무를 복원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50년 이상 춤을 추고 있고 40여년간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더욱이 두 딸까지 승전무 이수자로 키웠다.

    통영 출신인 그는 일찍이 초등학교 시절에 춤과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의 친구가 운영하던 교습소에서 발레를 배웠던 그는 학예발표회 때마다 발레 공연을 펼치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던 중 유명 국악인들과의 운명적 만남이 그에게 찾아왔다. 창극이 유행했던 시절이어서, 당시 할머니가 운영하던 여관에는 통영 순회공연에 나섰던 유명 창극단이 숙식을 하는 일이 잦았다. 할머니는 손녀를 국악인들에게 소개하며 춤을 가르쳐 주도록 청을 놓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딸이 ‘딴따라가 된다’며 싫어했지만, 할머니는 피리와 퉁소를 사다 주고 춤옷도 맞춰주는 열성을 보였다.

    그는 “당시 창극단 흉내를 ‘팔자’로 낸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어요. 조금 타고난 게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는 겸연쩍은 듯 웃는다.

    통영여중에 진학한 그는 무용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춤인생을 시작한다. 승전무 북춤 예능보유자인 그는 칼춤 예능보유자로 중학교 1년 후배인 엄옥자(부산대 교수)씨를 2학년 때 만났다.

    통영여고에 다닐 때는 무용하는 친구들과 함께 태평가와 창부타령 등을 틀어놓고 작품 창작을 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 틈틈이 유명 국악인의 강습에 참여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조금만 더 춤을 배우면 되겠다는 생각에 더 이상 진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는 속마음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학벌을 최우선으로 꼽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춤꾼이라고 해서 비켜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춤과 잠시 떨어져 있었던 적은 결혼 후 딱 1년간이었다. 남편을 따라 대구에서 신접살림을 차렸을 때였다. 그러나 대구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이 운영하던 가구점의 수입이 마뜩지 않았기 때문이다.

    1년 만에 통영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무용교습소를 차렸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습이었다. 물론 생계 유지에 큰 힘이 되었다.

    승전무와의 운명적 만남은 이때 이뤄졌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당시 통영여고 교장을 포함한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은 통영에 엄연히 지역 대표적인 춤인 승전무가 전승되고 있었는데도, 인근 진주의 검무만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것에 대해 자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때 정순남(작고) 할머니가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지목됐다. 당시 예순 살로 몸도 약했던 할머니는 기방을 통해 전승되고 있던 춤을 되살려 달라는 요청이 영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씨 등은 정 할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자칫 사라질 뻔했던 승전무의 동작 하나하나를 되살려내기 시작했다.

    정 할머니가 몸이 불편해 춤사위를 정확히 나타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한씨 등은 그럴 경우 정 할머니의 구술에 따라 춤을 완성해 나갔다. 손의 위치는 어깨 위 몇 치이며, 회전은 몇 걸음을 떼고 난 뒤에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춤출 때의 복장도 일일이 할머니의 확인을 거쳤다. 천의 색깔이며 두루마리나 한삼(소매 끝에 길게 덧댄 소매)의 길이도 모두 정 할머니의 구술에 따라 하나하나 재현됐다.

    북춤과 칼춤으로 나눠지는 승전무는 이순신 장군이 이 지역에 설치했던 통제영 산하 교방청에서 무인(舞人)들이 추던 춤이었다. 임진왜란 때 병선 위나 진지에서 병사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또 싸움이 끝난 뒤에는 전승을 축하하고 각종 의식 때 하례의식으로 연희되었다.

    한씨 등을 포함한 지역 인사들의 노력으로 승전무는 1968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21호로, 정순남 할머니 등 4명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승전무 복원에 중심 역할을 감당했으면서도 ‘어린 나이’ 때문에 예능보유자가 되지 못했던 한씨는 1986년 준보유자로 지정됐고, 1996년에는 후배 엄옥자씨와 함께 예능보유자 즉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한씨는 북춤, 엄씨는 칼춤 보유자로 각각 나눠졌다.

    이에 앞서 승전무는 1987년 칼춤이 합설되면서 문화재 재지정 절차를 거쳤다.

    한씨는 정 할머니를 통해서는 승전무를 복원하는 한편, 무용학원이나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출강을 통해 승전무 전수활동을 벌여나갔다. 특히 충렬여상은 한씨의 이 같은 노력 끝에 승전무 전수학교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 전수조교로 지정된 장영미(52), 김정희(52)씨 등도 여고 시절 한씨로부터 승전무를 배웠던 인물들이다.

    한씨는 통영시 정량동 예능전수관에서 통영지역 20여명을 포함해 모두 70여명에게 승전무를 전수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학의 교수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그는 또 한양대 사회교육원에도 매주 한 차례씩 출강하고 있다.

    “80년대 전국민속경연대회 때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받은 것이 승전무와 인연을 맺은 이후 가장 기뻤던 일”이라며 “전수조교를 늘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승전무를 전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선 선조 때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한때 통제영 본영으로도 사용됐던 세병관에서의 마지막 공연이 10여년 전이라며, 한산대첩과 연관된 역사적 장소에서 승전무를 공연했으면 하는 바람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역시 타고난, 승전무를 운명처럼 받아들인 춤꾼이었다.

    글= 서영훈기자 float21@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 승전무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란 때 병선 위나 진지에서 장졸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또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통제영 산하 교방청 무인들로 하여금 연희토록 했던 것으로 북춤(무고)과 칼춤(검무)으로 나뉜다. 원래 궁중에서 연희되던 궁중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북춤은 중앙에 위치한 큰 북 주위에서 원무(圓舞)하는 4인과 그 바깥쪽에서 협무(挾舞)하는 12인으로 구성된다. 원무자는 청, 백, 홍, 흑색의 장삼에 족두리, 그리고 한삼(덧댄 소매)에 북채를 양손에 들고 춤을 춘다. 또 협무자는 ‘지화자’라는 후렴을 넣으며 창을 하는데, 춤새가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한 특징이 있다.

    칼춤은 8명이 칼을 들고 연희하는 것으로, 장졸들의 정신을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춤이다. 조직적이고도 아기자기한 멋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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