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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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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문화] (22)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이윤석씨

춤에 미쳐(狂) 명인에 미친(及) 우리춤 지킴이

  • 기사입력 : 2008-02-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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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꽹과리, 징, 장구, 북이 엮어내는 신명나는 장단에 맞춰 점잖게 맴을 돈다. 맵시있는 어깻짓, 유연하면서도 힘찬 팔동작. 두 팔을 치켜들고 뛰어오르니 비상하는 학의 형상이다.

    고성읍 동외리에 있는 오광대 전수회관 2층 대강당.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인 이윤석(57·고성오광대보전회장)씨가 춤사위를 펼치자 전국에서 고성오광대를 배우러 온 전수생들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추임새를 넣는다.

    이씨가 전통춤에 대해 흥미를 느낀 것은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다. 멋도 모르고 풍물패를 따라다니기도 했고 한동네에 살던 오광대 예능보유자인 조용배, 허판세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잔심부름을 하고 구경도 했다. 꽹과리 장단에 절로 어깨춤이 추어질 적도 많았다.

    학교 졸업 후엔 동네를 어슬렁대다 돈을 한번 벌어보자 싶어 배를 타기도 했고 공사장 인부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던 1968년 두 살 위인 신부와 결혼한다. 고성 사람들은 오늘의 이윤석이 있는 것은 그의 아내 덕분이라고 말한다.

    밭에 일거리를 두고 훌쩍 춤추러 가버리면 남은 일은 고스란히 아내 몫으로 돌아갔고, 언제나 군말 없이 감당해주는 걸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입대후 최전방에서 철책선 근무를 하면서 여태까지 인생을 잘못 살았고 아내를 너무 고생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이 다 나서 제대한 후 1975년 5월 오광대판에 들어갔다. 조용배, 허판세 선생에게 진작부터 보고 들어 기본 장단과 몸짓은 이미 익혀놓은 후였다.

    오광대판에 들어가면 사람 버린다는 말을 들은 아내가 반대하자 술 마시고 헛소리하는 일 없을 거고 노름판엔 근처도 안 갈 것이며 여자문제로 애먹이지 않겠다는 3가지를 약속한 후 입문했다.

    유연하고 활달한 동작으로 춤판을 휘어잡는 그에게 유혹의 손길이 없었을 리 없지만 지금까지 그 약속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오광대에 입문한 후 허종복 선생에게서 기본춤과 말뚝이 춤, 조용배 선생에게서 문둥북춤. 허판세 선생에게서 원양반춤을 배웠다.

    그의 춤은 말뚝이춤과 덧배기춤이다. 오광대 다섯 과장을 전부 배웠지만 그 중 두 번째 과장에 등장하는 말뚝이춤이 전문이다. 그가 오광대의 많은 배역 중에 말뚝이 역을 택한 것은 양반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깨우침을 주는 말뚝이가 70, 80년대 활발했던 농민운동과 부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뚝이는 서민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양반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서민의 대변자로 커다란 몸짓으로 단연 놀이마당을 압도한다.

    힘차게 뻗는 춤사위, 말채로 땅을 내리꽂는 동작은 역사의 아픔을 풀어내고 인간 평등을 주창하는 활달하고 장엄한 은유의 몸짓이다.

    말뚝이춤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뚝이탈을 쓰지만 무대 위에서 혼자 덧배기춤을 출 때 그는 탈을 벗는다.

    ‘덧배기’란 경상도 일대에서 남자들이 마당에서 추는 활발한 춤을 말한다. 굿거리로 뛰다가 급작스레 방향을 전환해 땅에 엎드렸다가 천천히 일어서는 남성적이고 웅장한 춤인데 특별한 순서나 격식이 없다.

    그는 춤꾼이면서 마암면 명송리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다. 춤과 농사가 둘이 아닌 하나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한 가지도 완벽히 하지 못한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20년 전부터 비닐하우스를 시작해 별의별 작물을 다 심어봤지만 헛말이라도 돈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추수 때의 가격을 정확히 짚어내 농사 품목을 정해야 하건만 늘 뒷북을 치거나 너무 앞서가 버렸다. 오이, 호박, 고추, 국화, 안개꽃, 큰 토마토, 방울토마토가 다 그랬다.

    오광대는 농한기나 명절에 그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풍물패와는 다르다.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이다 보니 여기저기 공연도 많고 전수자도 길러내야 한다.

    고성오광대 전수가 시작된 것은 1974년부터다.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열린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고성오광대가 대통령상을 받은 그해 부산 계성여상 학생들에게 첫 전수를 시작했으며 이듬해 공주사대 학생들이 전수를 받았다.

    이 무렵부터 방학 때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고성으로 몰려들었다. 오광대를 배우려는 대학 탈춤반 학생이거나 직장 문화패들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중국에서도 찾아왔다.

    많을 때는 한해 1000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전수회관이 비좁아 창고를 빌려 전수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대략 3만명이 고성에 와서 오광대 춤을 배워갔다. 마스터까지는 못해도 잠시나마 말뚝이춤의 매력과 멋을 시늉은 해보는 것이다. 전수생들은 이윤석의 거침없고 활달한 말뚝이춤에 흠뻑 매료돼 돌아간다.

    하지만 최근엔 취업난 탓인지 예년에 비해 전수받으려는 대학생들이 많이 줄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오광대에 참여하려는 지역의 젊은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다는 것이다. 오광대를 하면서 생계가 해결된다면 몰라도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시간과 돈을 희생하면서 선뜻 춤판에 뛰어들 청년들이 없기 때문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보존회원들이 50여명이 됐는데 지금은 30여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춤판을 벌일 때는 20여명밖에 안 모인다고 한다. 회원 대다수가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기 때문에 바쁜 농번기 때는 춤판으로 오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점이 많다. 군청과 문화재관리청의 지원을 받아 전수회관 운영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오광대에 매달려 일을 보는 사무국장과 간사의 급여를 제대로 주지못해 늘 마음에 걸린다.

    그에게 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냄으로써 흥을 느끼고 신명마당으로 이뤄가는 것이다.

    춤꾼 이윤석은 오늘도 들녘에 있는 춤꾼들을 불러내 장단에 맞춰 얼쑤덜쑤 춤을 춘다.

    글= 양영석기자 yys@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 고성오광대= 오광대는 남부지역(낙동강 서쪽지역)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초계 밤마리 마을 장터에서 놀던 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란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오행설(五行說)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오행설 의견이 유력하다.

    고성오광대는 서민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는 전통놀이마당으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7호로 지정됐다. 놀이는 문둥이춤·오광대춤·중춤·비비춤·제밀주춤의 5마당으로 구성된다. 문둥이·말뚝이·원양반·청제양반·적제양반·백제양반·흑제양반·홍백양반·종가도령·비비·비비양반·중·각시·영감·할미·제밀주·마당쇠 등 총 1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고성오광대 놀이의 내용은 민중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처와 첩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다른 지방의 오광대에 비해 놀이의 앞뒤에 오방신장춤, 사자춤 같은 귀신 쫓는 의식춤이 없고, 극채색(極彩色)을 많이 쓰며 오락성이 강한 놀이들로 구성돼 있다. 주된 춤사위는 덧배기춤인데 배역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춤으로 잘 표현되어 있고 반주음악으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타악기가 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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