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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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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말의 힘, 말의 독 - 최미선(동화작가)

  • 기사입력 : 2008-05-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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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합니다. 고객님!”

    발신음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114 안내 인사다. 몇 년 전부터인가, 114에 전화를 하면 알지도 못하는 여성으로부터 난데없이 사랑한다는 말부터 듣게 된다. 매번, 들을 때마다 여전히 생경스럽고 적응이 안 된다.

    평생토록 고대어를 연구하다 정년을 하신 어느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랑’의 어원은 ‘살강’에서 나왔을 것이고 ‘사랑’ 혹은 ‘사랑스럽다’라는 말은 육친의 어른들이 집안 사람들에게 쓸 때가 가장 자연스럽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에도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했는데 나름대로 의미를 풀어보니 ‘몸을 불사르게 할지라도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면 무의미한 것’이라고 해석이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희생이나 양보가 뒤따라야 하는 것. 그런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 될 게다. 사랑의 지난함을 말해주는 문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여성이 느닷없이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들을 때마다 어색하고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하긴 114 안내를 하고 있는 분들의 입장에서도 아마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이리라. 하루 종일 그 말을 해야하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랑’한다고까지 말한 그 분이 안내해준 전화번호가 틀리기라도 했을 때는 ‘사랑’하지 말고 ‘정확’하기만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고객을 위한다는 의지의 한 표현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감정의 과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지난 겨울, 도내의 구비민속자료를 채록하기 위해 동료 두명과 함께 서부 경남의 한 지역을 돌아다녔다. 정겨운 토박이말, 삶의 모양이 담겨있는 입말, 고어의 잔재가 남아있는 옛말 등 좋은 말들을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마을분들은 화려한 수사(修辭)도 없고, 겉치레의 과장도 없는 그런 담담한 말을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천천히 조용하게 들려주었다. 비뚤어지지 않고, 손상되지도 않았고 진솔한 마음이 느껴지는 소중한 토박이 말들이었다.

    채록을 마치고 햇살이 환하게 비치던 그 툇마루에서 일어날 때는 마음속에 샘물이 가득 고여드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말과 글이 나날이 과장되고 거칠어지고 또 비속화되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제 비속화의 과정을 지나 아예 냉정을 잃은 듯하다. ‘말·글’이 스스로 이성을 잃을 수 없는 노릇이고 결국 ‘말·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성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말초적이고 감각적으로 나타낼까 혈안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고운말, 바른말 사용을 독려하는 뜻 있는 분들은 있어왔고, 한때는 신문 방송도 이에 부응하여 좋은 ‘말·글’의 표본이 되려고 노력해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요즘의 신문이나 방송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앞서서 말초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할까 혈안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공공기관이나, 언론매체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기관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황과 경우에 맞는 말, 지나치지도 넘치지도 않은 좋은 말 사용으로 사회의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칼럼

    최 미 선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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