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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겨울 강가에서- 이동이(수필가)

  • 기사입력 : 2009-12-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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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강의 흐름이 그리워 살을 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으로 차를 몰았다. 사라 브라이트만의 노래가 오늘따라 더 감미롭다. 배려심이 깊고 알뜰한 지기가 건네준 테이프에 애정이 담겨서 그런가보다. 서두르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화사한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내 가슴이 훈훈해 온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사람들의 인품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누군가를 닮고 싶어하는 행위는 상대에 대한 애정의 행위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지 싶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고 더불어 한세상 살아간다는 것이 축복으로 여겨진다. 차창 밖으로 계절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선다. 꽃눈 틔우는 봄의 인기척으로 산이 수런거렸고, 키 큰 나무 그늘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매미소리가 절절했는데…. 차츰 홍엽이 온 산을 물들이고, 담장 너머 감나무마다에는 조랑조랑 알전등을 켜더니만, 어느새 버리고 내려놓음으로써 누리는 고요한 안식의 겨울 들녘으로 들어와 있다. 세월은 무엇을 연모하기에 앞으로만 내달리는 것일까.

    강 언덕에 차를 세우고 강가로 내려섰다.

    며칠간 영하의 기운이라더니 바람이 물살을 거꾸로 끌어올리느라 허우적거린다. 저렇게 시달림을 당해도 느긋함이 한결같다. 아마 유년 시절에 보았던 강의 견고한 의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날, 강 하류에서 떠밀고 오는 거센 역풍을 받아 강물은 낡은 천막처럼 펄럭거렸다. 마치 바람이 강물의 몸을 난도질하여 강물의 껍질을 벗겨내려는 것 같았다. 강물은 그 진통을 이기지 못해 마구 몸을 뒤틀어댔다. 그렇게 처절한 밤이 깊어간 다음 날에는 강물 위에 유유히 떠있는 평화로움을 보았다. 게다가 내성의 고요함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먹먹해졌는지…. 그 이후 혼돈이 몰려올 때면 무작정 강을 찾아 나섰다.

    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사유의 파장이 일어난다.

    비 오는 날에는 강물에 어리는 우수에 젖고, 눈이 오면 눈송이들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은근함에 이끌린다. 바람 부는 날에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였거나 잠시라도 미움을 지녔던 사람들과의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 거센 물살에 두려움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도 한다. 차분하게 나를 다독거리다보면 생각의 단초에서 많은 영향이 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개 사람들은 불행할 땐 쉽게 마음을 열지만, 정작 좋은 일이 생기면 열었던 마음도 도로 닫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진정한 우정은 소나무가 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송무백열(松茂栢悅)에 버금가는 우정이 아닐까. 속내를 털어놓고서도 후련하고 개운한, 그런 기분을 갖게 하는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까. 각박한 것은 세상살이이기 이전에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래 전 신문에 연재되었던 신영복 선생이 쓴 글이 떠오른다. 그분이 1년간 여행지에서 써 보낸 엽서의 마지막 단원에 태산일출을 그렸다가 지운 이야기가 있다. 태산만 남겨놓고 해를 지운 것은 새로운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지금까지 가슴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이 구절은 늘 나를 담금질시킨다. 누군가를 위해 옆을 비워놓은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상대를 위해 얼마만큼 배려를 하였는가. 자문하는 내도록 부족하기 그지없어 부끄럽기만 하다.

    강물에 손을 담그니 차디찬 물살의 흐름이 손끝을 타고 전신으로 스며든다. 지나간 한 해 동안 겪었던 모든 사연들을 흐르는 물살에 풀어 놓는다. 나의 진심을 몰라주던 서운함도, 고락을 함께 나눴던 애틋한 정한도, 하염없이 솟구치던 그리움도 다 풀어놓았다.

    이제 망각의 강으로 멀리멀리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다.

    고적해도 마음은 가볍다.

    이동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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