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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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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김혜순

  • 기사입력 : 2010-01-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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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광 속에 멀어지는 당신 뒷모습 열쇠구멍이네

    그 구멍 속이 세상 밖이네

    어두운 산 능선은 열쇠의 굴곡처럼 구불거리고

    나는 그 긴 능선을 들어 당신을 열고 싶네

    저 먼 곳, 안타깝고 환한 광야가

    열쇠구멍 뒤에 매달려 있어서

    나는 그 광야에 한 아름 백합을 꽂았는데

    찰칵

    우리 몸은 모두 빛의 복도를 여는 문이라고

    죽은 사람들이 읽는 책에 씌어 있다는데

    당신은 왜 나를 열어놓고 혼자 가는가

    당신이 깜빡 사라지기 전 켜놓은 열쇠구멍 하나

    그믐에 구멍을 내어 밤보다 더한 어둠 켜놓은 깜깜한 나체 하나

    백합 향 가득한 광야가 그 구멍 속에서 멀어지네

    ☞ 여기, 열쇠 하나가 있다. 아파트나 자동차 문을 따기 위한 열쇠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니, 얼마나 맥 빠지겠냐마는 ‘우리 몸은 모두 빛의 복도를 여는 문’을 지나 ‘당신은 왜 나를 열어놓고 혼자 가는가’라는 구절까지 용케 내려온 독자라면? 문학작품을 ‘현실적 모순의 상상적 해결’이라고 말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고전적 입을 굳이 열쇠구멍 삼지 않더라도 시(詩)의 위력은 입증된다. 자, 그러니까 나는 혹은 당신은, 당신이 깜빡 사라지기 전 켜놓을 열쇠구멍 하나라도 있을까? -김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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