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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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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소통(疎筒)- 김명희(시인)

  • 기사입력 : 2010-02-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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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주 전 TV 프로그램인 ‘진품명품’에 1m 남짓한 높이의 직사각의 통이 소개되었다.

    맨 아래 사자를 투각한 난간대가 연꽃을 떠받친 그 위로 모란, 봉황이 차례로 새겨진 데다 둥근 뚜껑까지 원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모양은 흡사 나무에 단청을 입히고 뚜껑을 덮은 굴뚝 같아 보였다.

    짐짓 쇼 감정단의 일원이 되어 설렘과 호기심으로 목공예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들었다. 피나무를 재료로 한 통의 용도는 발원문을 넣어두는 것이라 한다.

    직접 만져본 것도 아닌데 어떤 신령함이 느껴져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한 기류가 순간 확 달아났다.

    소통(疎筒)은 불교신도들이 축원할 내용을 넣어두는 용기로 쓰였다. 직사각의 긴 통으로 만들고 그 속에 꽂아 둔 막대기에 발원문을 적은 원패를 끼우고 뚜껑으로 덮어둔다. 발원문을 넣을 때는 큰스님이 발원기간을 정하고 간단한 의식을 치른다. 발원기간이 끝날 때에도 발원문을 꺼내 부처님께 고한 다음 불을 붙여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소지(燒紙) 의식을 행한다.

    소통을 만든 이 또한 단단한 나무에 공들여 각을 새기면서 하루의 안녕과 일 년, 그리고 크게는 전 생의 소원을 담았을 것이다. 나무의 결을 살려 꽃잎을 피우고 그 위에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봉황을 새긴 의미도 예사롭지가 않다.

    어쩌면 옻칠과 단청을 하여 대중들의 발원문을 넣는 아름다운 통을 만드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랜 세월의 무게에도 그 몸새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튼튼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리라. 그 통을 매개로 한 개인의 소원은 물론 사바 대중들의 염원이 구원자에게 가 닿았으리라.

    이처럼 소통(疎筒)은 소통(疏通)을 위한 도구이다. 그것은 신이나 부처님과 소통하는 길이자 바로 나와 너, 나아가 사회와의 소통으로 이어진다. 개개인의 소원이야 다 다르겠지만 축원을 하는 간절함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삶에 기원(祈願)이 없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고난과 역경이 따를수록 기원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경제 불황과 축 처진 청년 실업의 어깨를 더욱 짓눌렀던 겨울 한파를 우리는 몸소 체험했다.

    일본의 민속학자이자 시인인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는 겨울을 늘어나는 계절이라고 했다. 무엇이 늘어나는가? ‘다마’, 즉 영혼이 늘어난다고 했다.

    ‘다마’를 속이 텅 빈 화살통 모양의 용기 속에 가두어 그것을 음악과 함께 흔들거나 해서 ‘다마’의 활동을 자극하면 ‘다마’는 분열을 일으켜 점점 그 수와 힘을 늘려가게 된다. 그러면 세계는 젊은 힘이 충만해지고 대지에 활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힘이 주위에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추운 겨울철은 ‘다마’를 늘리는 제의가 행해지는 기간이며, 영혼의 힘이 점점 증식을 일으키는 특별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제각각의 발원문을 소통에 넣어 두고 축원하는 마음으로 겨울의 끝자락을 빠져 나오고 있다. 그곳에는 졸업과 입학의 젊음이 흥성거리고, 발원문을 꺼내 소지(燒紙)를 올려야 할 경건함과 가슴 떨림이 있다.

    가슴 벅찬 희열이 밴쿠버의 얼음판을 뚫고 금빛으로 피어나고 있다. 대지를 흠뻑 적신 우리 젊은이들의 땀방울과 함성이 점점 상승기류를 타고 있다. 그 기운은 또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발원문이 되어 빙판을 새처럼 차고 오르리.

    더 넓고 높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소지(燒紙)를 올리듯.

    김명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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