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17일 (금)
전체메뉴

[열린포럼] 늘 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라- 최환호(경남은혜학교 교장)

  • 기사입력 : 2014-04-15 11:00:00
  •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김소월 ‘초혼’)”

    초혼(招魂)은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들고 지붕 위나 마당에서, 북쪽을 향하여 “○○동네 아무개 복(復)!”이라고 혼을 세 번 부르는 의식이다. 저승 문턱을 넘기 전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혼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염원에는 현세 중심적 생사관이 철저히 배어 있다. 오죽하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 중에서 최고의 자살률과 자살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그 부동의 1위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OECD 평균 3배에 이르는 자살률이다. 청소년 자살률도 넘버원이고 75세 이상 자살률은 8배 이상이다.

    하루 자살자가 약 40명, 한 해 대략 1만5000명의 존귀한 생명들이 사라지는 사회가 정상사회일까? ‘삶 속의 죽음상태(T. S. 엘리엇)’ 아닐까?

    더불어 세계적 ‘고위험 사회’이기에 곳곳이 지뢰밭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한 발 한 발이 생사의 교차점을 딛고 있다.

    그러니 어찌 이력서의 굵은 몇 줄을 위해, 세속적 성공에 목매느라 귀중한 인생을 다 놓쳐버릴 수 있겠는가. 결정적으로 신보다 더 믿었던 부, 명예, 권력, 그 모든 것들조차 죽음이 속절없이 거둬 가버린다는 거다.

    하여 선진 사회일수록 ‘제3의 잣대(The Third Metric)’ 운동이 공감을 얻고 있다. 돈과 권력을 넘어 성공의 의미를 재정립해보자는 거다. 이제는 삶의 질, 지혜, 나눔 등 새 잣대로 인생의 성공을 가름해보자는 것일 터.

    최근 실질적 대안으로 ‘나의 죽음 사유하기’가 대두되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음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가까운 사람들을 영원히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서부터 수만 수천명이 죽거나 다친 지진, 태풍 등 천재지변과 대형사고까지. 더하여 숱한 죽음을 오락화·희화화하는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온갖 죽음에 익숙해진 탓에 타인의 참혹한 죽음을 보면서도 공포를 느끼기는커녕 박수를 치거나 웃기까지 한다.

    묻노니 당신, 죽음의 일상화 세상에 살면서 정작 자신의 죽음은 까맣게 잊은 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석하느뇨?

    “죽음은 반드시 찾아오고(필연성), 얼마나 살지 모르며(가변성), 언제 죽을지 모르고(예측불가능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편재성) 강자(셸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미주리대의 심리학자 케네스 베일은 ‘죽음이 삶에 유익할 때’라는 논문(월간 ‘인성과 사회심리학 평론’ 2012)에서 죽음을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공포를 느끼거나 부정적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죽음에 대해 숙고할수록 오히려 공격적인 행동(자살, 살인)을 삼가게 되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등 건강과 일상을 더 돌보게 되며, 남을 돕는 이타심이 생길 뿐만 아니라, 흡연율과 이혼율도 감소하는 등 성숙한 행위가 더 증가한다고 보고했다.

    그간 마이클 위더맨과 많은 심리·정신의학자, 철학자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죽음을 생각할수록 세속적 성공보다 영혼의 해방을 더 중시한다는 거다. 죽음을 사유하는 사람만이 탐욕의 부질없음과 두려움의 실체 없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생사에 걸림 없는 영혼의 자유는 유위의 욕망을 떠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기에. 결국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니체)’.

    무감각·무의식 상태로 하루하루를 산다면, 백 년을 살건 천년 만년을 살 건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저 걸어 다니는 시체요, 달리는 고깃덩어리라. 고로 “늘 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최환호 경남은혜학교 교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