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19일 (일)
전체메뉴

에베레스트에 오른 월급쟁이 이야기 (9) 꿈을 좇아도 죽지 않는다

내 생애 가장 치열했던 70일… 꿈 이룬, 꿈같은 등반

  • 기사입력 : 2016-03-21 22:00:00
  •   
  • 살기 위해선 내려가야 한다. 이제부터는 이곳이 바닥이다. 땅으로부터 정상이지만 내려가기 위한 바닥이다. 더 이상 이곳에서 울어대면 숨이 차 죽겠다 싶어 하산을 서두른다. 걱정 말아라. 내 안에 있는 힘은 이미 모두 공중분해됐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알지 못하는 힘으로 나를 인도할 것이다.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하산은 오르는 것보다 힘들다. 오르느라 모든 힘을 다 써버린 상태다. 거의 대부분의 사고가 하산할 때 일어나는 것을 비로소 절감한다. 스스로 주술을 건다. 살아 내려가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모든 힘을 빼내어 두 다리에 힘을 줘라. 고도 8400m쯤 됐을까. 남봉 경사면을 어렵사리 내려선 뒤 나는 갑자기 호흡을 할 수 없었다. 설벽에 아이젠을 박고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곧 호흡이 끊어질 것 같은 답답함이 계속됐다. 심호흡을 연거푸 해도 꺽꺽대기만 할 뿐이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한 갈증이 괴롭힌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갑갑함에 고함을 쳤는데, 어찌 된 일인가?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다. 어이가 없다. 난데없이 잠까지 쏟아진다. 겁이 덜컥 났다. 이대로 죽는구나 하며 속수무책으로 있을 때 누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벽래 형이다. 그는 곧바로 내 산소통의 게이지를 체크했고 산소가 바닥난 걸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형님, 산소! 으으으 산소!’

    벽래 형은 하산 중이던 타국 원정대 셀파(하산해 알아보니 그는 스위스 원정대 셀파였다)에게 다짜고짜 산소를 달라고 했다. 다행히 그 셀파는 여분의 산소가 있었고 나는 빛의 속도로 산소통을 바꿔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메인이미지
    죽음의 등반을 마친 다음 날, 캠프4의 텐트에서 나와 찍은 사진. 그제야 살아 있음을 느꼈다.

    이날, 하산 길 8500m 지점 힐러리 스텝 근처에서 광인(狂人)이 돼버린 사람을 봤다. 고소증세인지 동상 말기의 광적 행동인지는 모르겠으나 겉옷을 벗으려 했고 제 홀로 웃었다가 웅크렸다가 팔을 휘휘 저었다 했다. 지나는 모든 등반가들이 그를 만류했지만 이미 그는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지나쳤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그 일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그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날은 서울팀(같은 해 한국에서는 3개 팀이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서울팀, 허영호 대장님이 이끄는 제천팀, 그리고 우리였다)에도 문제가 생겼다. 서울팀의 대장님이 장시간 등반으로 인해 8400m 남봉 직전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벽래 형이 내려가는 길에 그를 발견하고 같이 하산하려 했으나 이미 그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나 정상 등정의 의지만 고집스레 남아 있었다. 하산하던 중 벽래 형이 그를 발견하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직감했다. 완력으로 하산시키려 했으나 그는 완강했고 무의식적인 헛발질과 오름짓만 계속할 뿐이었다. 그의 말과 언어는 어눌해져 있었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갖은 방법을 써도 그를 하산시킬 방도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벽래 형은 그의 발에 무릎을 꿇었다.

    “같이 내려가자. 내려가야 살 수 있다.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나도 죽고 너도 죽는다. 내 말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들어달라.”

    그리곤 두 손을 모았다. 멍해진 그를 잡고 형은 둘의 몸을 끈으로 묶었다. 엎어지고 쓰러진 끝에 두 사람은 하산했고 살아남았다. 서울팀의 대장님은 하산 후 치료 끝에 손가락과 발가락 하나씩을 잘랐다.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질척거리며 캠프4에 도착하며 곡절 많은 하산을 완료한다. 어젯밤, 이곳을 출발한 지 정확히 20시간이 지나 있었다. 붉은 오줌이 나왔다. 20시간… 죽음의 등반을 마친다. 등정의 기쁨 같은 건 없다. 곧바로 기절하듯 잠에 빠진다. 다음 날 캠프4, 아침에 일어나 눈물을 흘렸다. 그제야 살아 있음을 느낀다. 추위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이 최악의 추위가 나는 감사했다. 산소마스크를 체크하고 여전히 침낭을 열고 일어서는 사소한 일을 다시 할 수 있음에 나는 고마워했다. 아침에 일어나 세 사람(벽래 형, 남구, 필자) 모두 서로를 부여잡고 그렇게 울었다.
    메인이미지
    해발 8400m 지점에서 정신을 잃었던 서울팀 대장님.


    그러나 큰일이 생기고 말았다. 남구(원정대원 중 막내) 발 상태가 심상치 않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검게 변색돼 동상이 심각한 지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머리를 큰 망치가 치고 지나간다. 어제 저녁 캠프4로 하산을 마치고 비몽사몽해 쓰러졌는데 남구의 발을 제대로 체크하지 못했다. 항상 밝은 모습을 보였고 좀체 울지 않던 남구가 동상 걸린 발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보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올랐고 궂은일 마다하지 않았던 남구가 동상에 걸렸다. 나를 위해 정상에서 1시간이나 기다려 준 놈이다. 나 때문이다. 가슴이 미어진다. 벽래 형은 남구를 데리고 서둘러 하산하기로 했다. 뒤처져 내려오는 나를 향해 다급하게 묻는다. “혼자 잘 내려올 수 있겠제?” 두 사람은 베이스캠프를 향해 곧장 달렸다. 혼자 하는 하산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왼쪽 발목이 부러질 듯 통증으로 조여 온다. 발을 디딜 때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고통이다. 허기 또한 고통 수준이다. 근 3일간을 물과 스프만으로 버텼다. 배낭을 뒤져 초코파이 하나를 찾았고 설벽에 주저앉아 거지같이 엎드려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더 이상 내려갈 기력이 없어 캠프2에 이르러 넉다운된다. 혼자였다. 혼자 보는 에베레스트의 홍시 빛 일몰을 봤다. 푸모리가 붉게 물들었다. 신이 자신의 속살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고요함이 귀청을 때렸다. 이곳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날카롭고 시끄럽게 진동하면 우리를 감싼 마술의 베일이 찢겨지리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입에서 말이 새어 나오는 순간 이 고요함의 마력이 사라질 것 같다. 혼자 남은 캠프2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의 마지막 석양은 편안했고 아름다웠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다시 못 올 줄 알았다. 막내의 동상 진화를 막기 위해 헬기를 요청했고 내일이면 베이스캠프와도 마지막이다. 베이스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고요했다. 그리고 허전하다. 어제와 그제의 등정이 벌써부터 꿈같이 느껴진다. 눈물이라도 흘렸으면 좋으련만 허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푸모리의 실루엣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지겹도록 봐오던 ice fall, 푸모리, 촐라체, 로라봉, 눕체봉. 이제 이별을 고한다. 하나씩 하나씩 느릿하게 그러나 똑바로 끊어지듯 바라보며 각인한다. 내 너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부끄럽지 않았다. 내 생애 가장 치열했던 70일, 그 황홀했던 등반을 내 마음속 깊이깊이 묻는다.

    메인이미지
    제네바 스퍼 직전 구간을 하산하고 있다.


    공항에서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내 생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영해 준 적은 없었다. 악우(岳友)들은 물론이고 모교 교직원들과 학생들까지 나와 긴 현수막을 들어올리며 환호했다. 꽃다발을 가슴팍에 받아 들고 보라는 데를 보며 사진을 찍었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중에 군중 속에 활짝 웃으며 서 있는 아내를 봤다. 그녀의 맑고 환한 눈을 75일 만에 맞춘다. 그녀 눈은 신비롭다. 아내와 나눈 짧은 몇 번의 눈빛으로 그간의 가슴 벅찬 얘기를 모두 다 털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안아주고 악수하고 말을 건넸지만 내 시선은 멀리 서 있는 아내만 볼 뿐이다. 이따금 사람들의 머리에 가렸다가는 나타나고 나타났다가는 다시 가려 버리곤 하는 아내의 얼굴.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꺼억꺼억하며 넋을 놓고 싶었다. 아들이 내게 오려다 돌아선다. 엄마와 아빠(인지 아닌지 모를 사람) 사이에서 오가기를 몇 번 하더니 내 허벅지를 슬며시 잡고는 꼭 붙든다. 내 아들이 맞다. 나를 알아볼까 싶었던 세 살배기 아들이 내 옆에서 안아달라 보챈다. 꽃다발을 한 손에 옮기고 아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눈물이 터지려는 걸 끄으윽 하며 참았다. 바보같이 눈물만 많아졌다.

    원정대원들 중 직장인은 나뿐이다. 그러니까 금요일에 한국에 도착했고 월요일에 다시 출근했으니 여전히 얼굴은 히말라야 모드다. 시커멓게 탄 얼굴은 나 스스로도 봐주기 힘들 정도다. 내 몰골에 직장 동료들이 더 놀란다. 사내 신문에서 내 등정 소식을 미리 알렸던 터라 내가 출근했다는 말을 듣곤 이 부서 저 부서에서 구경을 왔다. 저기 시커먼 얼굴을 한 저놈이 과거에 어눌하게 말했고 절뚝거리며 다니던 그놈이 맞는지 모두들 신기해한다. 정상에서 회사 깃발을 날리던 사람이 진짜 너가 맞냐고 묻고 또 물었다. 진짜 꼭대기를 올랐냐고 재차 묻는다. 그들의 관심이 나쁘지 않았다.

    메인이미지
    하산 후 숙소에서 셀파들과 등반을 회상하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회사에서는 다행히 내 자리를 보전해 줬고 환영은 뜨거웠다. 에베레스트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잘 나온 것을 뽑았다. 크게 확대해서 멋진 액자에 넣어 내 휴직서에 서명했던 팀장님, 상무님 그리고 사장님께 드렸다. 고생했고 자랑스럽다 하신다. 또 하나같이 웃으며 물으신다. ‘또 갈 거냐?’, ‘괴롭혀서 죄송하다. 별난 아랫사람을 둔 죄라 생각해 주시라’ 했다. 그렇게 호랑이 같던 분들이 얼굴에 주름을 보이며 웃었다. 휴직서를 둘러싸고 벌였던 알력은 이젠 서로에게도 재미있었던 직장생활의 에피소드가 됐다.

    장재용(STX조선해양 혁신추진팀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