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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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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100세 시대- 심윤경(소설가)

  • 기사입력 : 2023-06-29 19: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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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선거일에, 나는 투표소 앞 긴 줄 안에 서 있었다. 하루 종일 줄은 길었고, 코로나의 끝물이라서 아직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남들처럼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 지루함을 이기며 서있었는데, 문득 투표 진행을 돕는 참관인이 도움을 청했다.

    “107세 유권자가 오셨습니다. 차례를 양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나 아닌 누구라도 이런 양보를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표정과 몸짓으로 기꺼움을 최대한 드러내 보이며,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하러 오신 107세 유권자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어르신을 보고 나는 내가 뻔하고 고루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그분이 들것이나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분은 아주 세련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았고 지팡이조차 짚지 않았다. 다소 천천히 걷기는 했지만 앞선 안내가 없었다면 나는 그분이 80대쯤 되셨으려니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 아무런 짐작조차 하지 않고 그분에게 어떤 관심이나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분은 107이라는 깜짝 놀랄 숫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노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91년 6월,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는 87이라는 숫자가 지금의 107처럼 들렸다. 107세 유권자와 나의 할머니를 겹쳐 떠올리면서 나는 그 사이 사람의 수명과 노년의 활력수명이 함께 길어진 것을 실감했다. 누구나 칭송할만큼 장수하고 세상을 떠나신 나의 할머니는 107세 유권자처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운신에 어려움이 없었다.

    “오금이 붙으면 안뒤야.”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바지런히 움직였다. 오금이 붙지 않기 위해서 할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왔고, 쑤시는 어깨를 풀기 위해 관절을 돌렸다. 지금 생각하니 손녀에게 어깨나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셔도 좋았을 텐데,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몸을 누구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움적거리면 뒤야.”

    할머니는 속상한 일이 있어도 불평하거나 한탄하는 법이 없었다. 나쁜 일이 있어도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을 한나절 이상 길게 가져가는 일도 없었다. 한숨 한번 쉬고 나서 몸을 움적거리는 것으로 할머니는 노년에 닥쳐오는 어려움을 모두 이겨냈다. 씩씩하게 약수터에 오르고 쑤시는 어깨를 혼자서 풀던 할머니는 단 하루도 몸져눕지 않고 어느 날 잠자듯 세상을 떠나셨다. 조촐하게 욕심이 없던 할머니가 거두신 생의 마지막 승리는 그 고요하고 갑작스러운 떠나심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지 않았던 어느 유월의 맑은 날에, 나와 부모님, 그리고 세 분 고모들은 할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갔다. 사랑이 많으셨던 우리 할머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 할 수 있다. 산소로 향하는 야트막한 오솔길을 걸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덧셈을 해보았다. 큰고모 96세, 둘째고모 93세, 아버지 89세, 막내고모 84세, 엄마 82세. 할머니의 직계자손 4남매의 나이를 더하면 362, 엄마까지 더하면 444년이라는 놀라운 시간이 조용히 내 앞을 흘러가고 있었다.

    간이 의자 두 개를 챙겼는데 고모들이 계시니 아버지께는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서 90세 이하는 모두 젊은이에 해당할 뿐이었다. 그늘에서 쉬시라고 해도 고모들은 좀 움직이는 게 좋겠다며 꼬챙이를 들고 산소 주변의 잡초를 뽑았다. 이제는 당신보다 연세가 높아진 딸아들 들에게, 땅 속에서 할머니는 다시 한번 조용히 속삭이셨을지도 모른다. 오금이 붙으면 안뒤야, 움적거리면 뒤야. 그분의 자녀들은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각자에게 주어진 노년의 시간이 얼마큼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것으로 수렴될 것이다. 오금이 붙지 않게 바지런히 움직이고, 속상한 일들은 몸을 움적거려 날려보내면 된다.

    심윤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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