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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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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한여름의 책읽기- 장석주(시인)

  • 기사입력 : 2023-08-03 19:3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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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엔 바닷가나 숲속 휴양지에서 알베르 카뮈의 ‘결혼·여름’,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 같은 책을 읽기에 좋다. 이 목록은 내가 젊은 날에 읽고 여름마다 되풀이해서 읽는 책이다. 범벅하게 말하자면 독서란 일탈, 해방, 몽상, 그리고 무위를 통해 누리는 한 조각의 행복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에서 ‘책들은 고요해진 언어의 대양에서 일어나는 파도 같은 것이다. 책들은 포말처럼 솟구친다’(파스칼 키냐르, 74쪽)라고 쓴다. 도처에 흩어져 있는 독자들은 언어의 대양에서 일어나는 파도에 온몸을 맡기고 몽상의 바다를 떠도는 걸 좋아한다.

    한여름 울어대는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나무 그늘 아래서 책 읽는 일이다. 내 경우는 그렇다. 나는 동물 사체에 맹금류들이 두 날개를 펼친 채 달려들어 맹렬하게 살을 찢고 삼키듯이 책을 읽어왔다. 조류가 제 발톱과 부리로 먹잇감을 물고 뜯으며 삼키는 일과 독서는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

    잘 알다시피 책은 각종 문자로 이루어진다. 문자는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죽간, 종이 위에 제 형태를 드러낸다. 책은 각종 문자의 집합이고, 문자는 의미를 기호화한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문자를 도약대 삼아 의미계로 솟구친다. 문맹인은 의미 없음에 방치된 채로 음지의 세계에 떠돈다. 반면 의미의 빛으로 넘치는 책을 손에 쥐고 읽는 자는 어둠에서 나와 빛의 세계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나아가는 셈이다. 독자란 잠들지 않고 깨어서 홀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다. 독서가들이란 대개 빛을 훔치는 밤의 도둑이거나 항상 깨어 있다는 뜻에서 밤의 야경꾼들이다.

    밤은 낮을 훔치고, 새는 곡식의 낱알을 훔친다. 달은 발광체가 아니지만 태양의 빛을 훔쳐 은빛 반사광으로 지상을 물들인다. 책 읽기는 그 본질에서 무언가를 훔치는 행위다. 책을 읽는 자들은 지식을 훔치고, 타인의 욕망을 훔치며, 일찍이 제가 누리지 못한 꿈과 동경을 훔친다. 훔친다는 것은 타인의 벽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들어가 제 존재를 숨긴 채 무언가를 ‘먹고, 삼키는’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애써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

    독서 욕망은 제 밖의 세계를 내 안으로 들인다는 점에서 도둑질이고 탐식이다. 책 읽기는 한가로운 소일거리, 고독한 취향, 무한한 기쁨을 누리는 일을 넘어서서 탈취이자 폭식이며, 무용한 기쁨의 도취다. ‘인간은 기원과 본능의 영향권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문화, 포착, 함께-포착, 타인의 포식, 학습의 와중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선재(先在) 하는 세계를 훔쳐야만 한다’(파스칼 키냐르, 앞의 책, 61쪽).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아버지의 정신과 어머니가 주는 살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도 필요한 법이다. 독서는 우리가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얻는 한 수단이다. 독서란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는 세계에서 필요한 그 무언가를 훔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독서를 고요한 몰입의 행위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책이 굶주린 자의 앞에 놓인 먹잇감인 한에서 독서란 책을 난폭하게 움켜잡고 책의 정수를 흡혈하는 행위다.

    활짝 펼친 책을 본 적이 있는가? 잘 살펴보면 그것은 두 날개를 펼친 새와 같다. 누군가 읽고 있는 책은 양 날개를 펼친 채 공중을 나는 새다. 새들은 공중을 난다. 독서란 정신의 저공비행, 몰입의 현기증 속에서 나는 일, 상상의 비행(飛行)이다. 책에서 눈을 떼지 말고 그 문면을 따라가라! 마치 새가 어디론가 데려가듯이 책도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런 뜻에서 독서는 항해이고, 여행이며, 모험이다. 책은 먼저 우리를 독서의 고독 속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러나 한 번은 살고 싶은 미지의 세계, 현실 저 너머 가상의 은신처로 데려간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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