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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돈을 위한 변명 - 왜 다시 신돈인가?- 김기섭(신돈역사연구회 이사장·부산대 사학과 명예교수)

  • 기사입력 : 2023-11-07 19: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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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세기 고려는 격동의 시기였다. 원이 점차 쇠퇴해지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 여파로 홍건적이 국내에 침략하여 개경을 함락시켰고, 왜구는 고려의 연안을 노략질하였으며, 공민왕대에 이르러서는 남해를 거쳐 개경 가까이까지 약탈을 자행하였다.

    원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와 기철 형제와의 갈등 속에 어렵게 왕이 된 공민왕은 반원 개혁을 주도하면서 고려의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기황후 세력은 충숙왕의 배다른 형제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앉히려는 심왕옹립운동을 전개하여 공민왕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홍건적의 침략, 왜구의 침구, 심왕옹립운동, 흥왕사의 변(공민왕 시해미수 사건) 등을 거치면서 공민왕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공민왕은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인물이 승려 ‘신돈’이었다.

    일개 비천한 승려였던 ‘신돈’의 출현에 권문세족과 신흥유신은 물론 불교계의 거목이었던 태고 보우도 반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신돈을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왕사로 임명하여 전권을 위임하였다. 여기에는 공민왕의 교묘한 정치적 의도가 들어있었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술수’나 다름없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사부는 나를 구하고 나는 사부를 구할 것이다. 삶과 죽음을 함께 하여, 다른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니, 부처와 하늘이 증명할 것이다.” 신돈은 공민왕의 맹세를 믿고 공민왕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공민왕은 14년 7월 신돈을 진평후로 봉하고 12월에는 공신호를 내렸다. 또한 신돈을 ‘영도첨의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로 삼으면서 실로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뜻에 따라 절대 권력을 가지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먼저 무장세력을 제거하고 내재추제를 시행하여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견제하면서 권세가들의 발호를 막았다. 특히 공민왕 15년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세가들의 불법적 토지 탈점을 막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양인들을 구제하였다. 또한 성균관을 중영하여 신흥유신의 성장을 지원하였다.

    신돈의 개혁 정책은 궁극적으로 공민왕 개혁 정치의 틀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돈은 이인이라는 인물의 거짓 투서에 의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공민왕 20년(1371) 7월 처형되었다. 신돈은 공민왕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지만, 조선왕조를 개창한 주도세력들에 의해 또다시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들은 우왕을 신돈의 아들로 둔갑시키고, 창왕과 함께 이들 모두를 ‘고려사’ 열전의 반역전에 신우, 신창으로 입전시켰다. 이어 ‘폐가입진’의 논리로 이들을 폐위시키면서 신돈을 조선왕조 개창의 제물로 삼았다. 과연 신돈은 반역자일까?

    김기섭(신돈역사연구회 이사장·부산대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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