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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30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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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전쟁, 마산방어전투] ③ 북한 최정예 부대 막아내다

북한 최정예 인민군 6사단 저지… 전쟁 흐름 바꿨다

  • 기사입력 : 2023-11-16 21: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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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당시 최후 보루인 마산을 지켰던 ‘마산방어전투’. 제대로 된 기념공간조차 없어 전투 중요성을 조명받지 못했지만, 지역 사회와 기념사업회 노력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전쟁사 전문가인 허남성 국방대학교 명예 교수를 만나 국군과 미군이 맞서야 했던 인민군 6사단과 마산방어전투에서 재조명해야 할 부분을 짚어본다.

    1953년 미국을 방문한 백선엽(앞줄 왼쪽부터) 장군이 미 25사단 27연대장으로 근무한 존 허시 마이켈리스 장군을 만나고 있다./허남성 교수/
    1953년 미국을 방문한 백선엽(앞줄 왼쪽부터) 장군이 미 25사단 27연대장으로 근무한 존 허시 마이켈리스 장군을 만나고 있다./허남성 교수/

    6사단 이끈 방호산은 뛰어난 전술가
    남침 후 개성부터 진주까지 점령하며
    빠르게 진격해 와 마산서 모습 드러내
    미8군 “북6사단 기동 가장 훌륭” 평가


    ◇싸워야 할 적은 북한 ‘최정예 부대= 미군과 국군이 마산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인민군 6사단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인민군 6사단을 이끈 방호산을 적군 중 가장 뛰어난 전술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한다.

    방호산은 1913~1916년생으로 추정된다. 16살 때 중국으로 넘어가 항일독립군으로 활동했고, 이후 중국 공산당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양대학 조선반에 입학해 수료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게릴라 전법을 담당했고, 광복 후에는 조선 의용군 사단 창설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해인 1949년 방호산은 인민군 6사단장으로 임명돼 곧장 사단급 훈련에 매진한다.

    방호산은 그야말로 ‘초엘리트’ 과정을 거친 군사 전문가였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은 “방호산은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를 공부한 순수한 공산주의자였다. 레닌과 스탈린, 김일성의 독재 공산주의를 배격하기도 했다”며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신속히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방호산은 그보다 공산주의 체제 우월성을 입증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군사 엘리트 방호산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 또한 최정예 부대였다. 6사단은 전쟁 발발 1년 전까지 중국 공산군 동북의용군 56군단 166사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중국 마오쩌둥은 1949년 6월 국공내전이 끝나자, 김일성에게 방호산을 포함한 사단을 넘겼다. 조선족으로 구성된 6사단은 국공내전을 겪었기에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인민군 소속이 된 이후부터는 각종 무기 사격 훈련을 비롯해 산악·야간훈련을 실시했다. 이들의 집중 훈련은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계속 진행됐다.

    6사단은 남침 후 개성과 인천을 점령한 뒤 서울 영등포에서 종적을 감췄다. 이후 군산, 목포, 여수, 순천, 하동을 거쳐 진주까지 점령하며 마산 인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뒤늦게 6사단을 발견한 미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은 “북조선 6사단의 기동은 지금까지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훌륭했다”고 평가했을 정도이다.

    워커 장군은 경북 상주에 있던 미 25사단을 마산으로 급파시켰다. 이후 국군과 미군은 마산에서 인민군 6사단을 맞아 45일간 고지를 19번 번갈아 점령할 정도로 치열하게 대치했다. 국군과 미군은 마산을 방어함으로써 임시수도 부산을 지켜냈으며 전쟁의 흐름까지 돌려놓았다.

    마이켈리스 美27연대장
    마이켈리스 美27연대장
    방호산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 인민군 6사단장


    인민군, 호남지역서 잠시 기동 멈출 때
    미25사단 상주서 마산 오는 시간 벌어
    이후 45일간 극한 대치 끝에 마산 방어
    임시수도 부산 지켜내며 흐름 돌려놔


    ◇왜 방호산은 마산을 바로 점령하지 않았나= 뛰어난 기동 능력을 갖춘 6사단은 호남 지역에서 진격을 멈췄다. 김일성은 부산 점령을 코앞에 두고 병사와 장비를 충원해 주며 진격을 재촉했다. 호남지방에는 인민군과 맞설 국군 병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6사단은 신속히 움직이지 않았다.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는 “6사단이 전주에 도착한 것이 7월 20일이다. 곧장 마산으로 진격했으면 7월 24일에는 진주를 함락시킬 수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6사단은 7월 24일에 남원에 있었고, 방어 병력이 없었던 진주로 곧장 진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천으로 이동했다. 그 뒤 6사단은 한참이 지난 8월 3일 마산 접경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는 미 25사단이 마산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다. 6사단의 지체는 대한민국에는 천운이었다.

    6사단이 상대할 저항 병력이 없었음에도 느린 진격을 한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 견해도 각기 다르다. 배대균 회장은 “뛰어난 전술가인 방호산이 호남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일각에서는 실수한 것이라는데, 방호산은 인민군 중 가장 뛰어난 전략가였다”며 “아마 방호산이 싸워야 할 미군을 유리한 시간과 장소를 골라 (호남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반면, 방호산이 호남지역에서 치안 유지, 물자 동원 등 민사 업무를 맡았기에 기동이 지연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방호산이 공부한 모스크바 동방학교는 군정을 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군정은 군사적으로 지역을 점령한 뒤 민간 정부가 들어서기 전 군대가 통치하는 방식을 뜻한다.

    허남성 명예교수는 “방호산은 민사·군정 분야 전문가였다. 방호산은 물산이 풍부한 호남을 평정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호남지역에서 징발해 부대에 식량을 대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며 “방호산이 호남에서 민사 업무를 한다고 일주일을 허비했을 것이다. 당시 호남 지역의 우익을 척결하고, 군인, 경찰을 많이 처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록에 보면, 방호산이 점령 지역 의사들을 많이 차출했다고 한다. 8월 말에 이르면 낙동강 방어선의 인민군 3분의 1이 남한에서 징발한 사람이었을 정도다”며 “만약 방호산이 민사 업무를 하지 않고 곧바로 진격했으면 마산이 쉽게 점령됐을 것”이라고 했다.

    방호산은 공적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뒤 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후 인민군 제5군단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했지만, 1959년 반정부 활동이었던 ‘8월 종파사건’에 연루돼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참고문헌= 배대균(2020) ‘마산방어전투’ , 배대균(2021) ‘창녕 방어전투 실화’, 하순복(2022) ‘낙동강 방어선 중 마산 서부지역 전투의 재조명’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 인터뷰

    “낙동강 방어선 소방대 역할한 마이켈리스 장군 재조명해야”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

    -현재 마산방어전투, 마산 서부지역 전투 등 전사 명칭이 다른 상황이다. 어떻게 정리해야 한다고 보는가.

    △이름 붙이기에 다르지만, 마산방어전투란 명칭이 제일 맞는다고 생각한다. 마산방어전투라고 해야 서북산, 옥녀봉, 함안지역 등을 다 포함할 수 있다. 여러 작은 전투를 묶어서 설명할 수 있고, 이름을 듣고 한 번에 전투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마산서부지역전투라는 표현도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명칭을 쓰면 주된 고지전이 펼쳐친 서북산은 위치상 북부에 가깝기에 애매하다.

    -마산방어전투 중 재조명이 필요한 인물이 있는지.

    △존 허시 마이켈리스 대장과 미 25사단 27연대다. 마이켈리스 대장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대령 진급 예정자였다. 그는 마산방어전투에서 27연대장을 맡아 참전했다. 27연대는 마산을 포함해 낙동강 방어선의 ‘소방대’ 역할을 맡았다. 1950년 8월 2일 마산 진동리에 투입됐다가 다시 창원으로 이동했고, 12일 경북 영산으로 투입됐다. 이후 다부동 전선이 위험해지면서 긴급 투입됐다. 그리고 다시 8월 25일 마산으로 복귀하고, 함안 전선으로 이동한다. 당시 워커 장군도 27연대 중요성을 고려해 포병 2개 부대와 다수 차량을 지원해 줬다.

    만약 27연대가 다부동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을 수도 있다. 이후 그는 주한미군 사령군 대장으로 예편했을 정도로 한미동맹에 중요한 인물이다. 재조명이 꼭 필요하다.

    -전쟁사 전문가로서 마산방어전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전투와 전쟁은 평가를 달리해야 한다. 마산방어전투만 보면 큰 성과를 못 냈었고, 아군 피해 또한 컸다. 하지만 전쟁 흐름을 바꾼 역할을 했기에 중요하고 성공한 전투다. 마산을 방어했기에 이 일대가 안정됐고, 강력했던 인민군 6사단도 그 이후 큰 전과를 이루지 못했다. 마산방어전투는 대한민국을 지켜낸 결정적인 전투다. 마산을 막았기에 부산을 지켰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대반격을 이뤘다. 마산방어전투 평가는 다시 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6·25전쟁 중 너무 쉽게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평가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공개된 북한 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은 29일 만에 한반도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40일이 넘어서야 낙동강에 도달했다. 이는 당시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을 잘 막았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전쟁 중 국군이 인민군에게 부대 단위로 투항한 사건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전쟁사에서 정말 대단한 일이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아래는 위 기사를 '챗GPT'로 번역한 영문 기사입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Below is an English article that translates the above article into 'ChatGP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Forgotten War, Battle of Masan] Part 3: Blocking North Korea's elite troops.


    The ‘Masan Defense Battle’, which defended Masan, the last bastion during the Korean War. The importance of the battle was not highlighted due to the lack of a proper commemorative space, but it is being re-examined through the efforts of the local community and the Memorial Association. We meet Heo Nam-seong, a professor emeritus at the National Defense University and an expert in war history, and look into what needs to be reexamined in the 6th Division of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and the Masan Defense Battle, which the ROK and US troops had to face.


    General Baek Sun-yup (front row, from left), who visited the United States in 1953, is meeting General John Hershey Michelis, who served as commander of the 27th Regiment of the 25th US Division./Professor Heo Nam-seong/
    General Baek Sun-yup (front row, from left), who visited the United States in 1953, is meeting General John Hershey Michelis, who served as commander of the 27th Regiment of the 25th US Division./Professor Heo Nam-seong/

    -Bang Ho-san, who led the 6th Division, was an excellent tactician.

    -After invading South Korea, they occupied everything from Kaesong to Jinju.

    -They advance quickly and appear in Masan.

    -U.S. 8th Army evaluated “North Korea 6th Division’s maneuver as the best”


    ◇The enemy we must fight against is North Korea's 'elite unit'= The People's Army 6th Division, with which the US and ROK troops had to fight to protect Masan, was a formidable opponent. War history experts evaluate Bang Ho-san, who led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6th Division, as the most outstanding tactician and strategist among the enemy forces.

    Bang Ho-san is believed to have been born between 1913 and 1916. When he was 16, he went to China and worked as an anti-Japanese independence fighter. Afterwards, on the recommendation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he entered the Joseon Dynasty class at Moscow Oriental University and completed it. After returning to China, he was in charge of guerrilla warfare, and after liberation, 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reation of the Joseon Volunteer Army division. In 1949, the year before the outbreak of war, Bang Ho-san was appointed commander of the 6th Division of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and immediately devoted himself to division-level training.

    Bang Ho-san was truly a military expert who had gone through a ‘super elite’ course. Bae Dae-gyun, chairman of the Masan Defense Battle Memorial Association, said, “Bang Ho-san was a pure communist who studied communism in Moscow. “He also rejected Lenin, Stalin, and Kim Il-sung’s dictatorial communism,” he said. “If Kim Il-sung’s goal was to quickly secure territory through war, Bang Ho-san tried to prove the superiority of the communist system over him.”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6th Division, led by military elite Bang Ho-san, was also an elite unit. The 6th Division participated in the ‘Civil War between China and China’ under the name of the 166th Division of the 56th Corps of the Northeast Volunteer Army of the Chinese Communist Army until a year before the outbreak of the war. When the Chinese Civil War ended in June 1949, China's Mao Zedong handed over the division, including Banghosan, to Kim Il-sung. The 6th Division, composed of ethnic Koreans, had extensive combat experience as it had experienced the Chinese Civil War. After joining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they conducted shooting training with various weapons as well as mountain and night training. Their intensive training continued until just before the war broke out.

    After the invasion of the South, the 6th Division occupied Kaesong and Incheon and then disappeared in Yeongdeungpo, Seoul. Afterwards, they occupied Gunsan, Mokpo, Yeosu, Suncheon, Hadong, and even Jinju, making an appearance near Masan. The US military, who discovered the 6th Division belatedly, could not help but be surprised.

    General Walker, commander of the U.S. 8th Army at the time, said, “The maneuvers of the North Korean 6th Division were the best of the entire Korean War so far.”

    General Walker dispatched the US 25th Division from Sangju, Gyeongsangbuk-do to Masan. Afterwards, the ROK Army and the U.S. Army faced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6th Division in Masan and engaged in a fierce confrontation, taking turns occupying the hill 19 times over 45 days. By defending Masan, the ROK and U.S. forces protected the temporary capital, Busan, and turned the tide of the war.


    Michaelis, Commander of the 27th Regiment.
    Michaelis, Commander of the 27th Regiment.
    Bang Ho-san, Commander of the 6th Division of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Bang Ho-san, Commander of the 6th Division of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When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temporarily stops maneuvering in the Honam region.

    -The US 25th Division found time to arrive from Sangju to Masan.

    -After 45 days of extreme confrontation, Masan was defended.

    -Protect the temporary capital of Busan and turn the tide.


    ◇Why didn't Banghosan occupy Masan right away?= The 6th Division, with its excellent mobility capabilities, stopped its advance in the Honam area. With the capture of Busan just around the corner, Kim Il-sung accelerated the advance by replenishing soldiers and equipment. Even though there were almost no ROK troops in the Honam region to confront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the 6th Division did not move quickly. Heo Nam-seong, professor emeritus at the National Defense University, said, “The 6th Division arrived in Jeonju on July 20th. “If we had advanced straight to Masan, we could have captured Jinju on July 24th,” he explained.

    However, the 6th Division was in Namwon on July 24th and did not advance straight to Jinju, where there were no defense forces. Rather, he moved to Suncheon. Afterwards, the 6th Division reached the Masan border on August 3rd. As a result, it gave the US 25th Division time to move to Masan. The delay of the 6th Division was unfortunate for Korea.

    The reason why the 6th Division advanced slowly despite having no resistance forces to deal with is still unknown. Academic opinions also differ. Chairman Bae Dae-gyun said, “It is still an unresolved question why Bang Ho-san, an outstanding tactician, did not move from Honam.

    Some say it was a mistake, but Bang Ho-san was the best strategist among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he said. “It appears that Bang Ho-san probably chose a favorable time and place for the American troops to fight and was waiting (in Honam).”


    On the other hand, some argue that the mobilization was delayed because Bang Ho-san was responsible for civil affairs such as maintaining public order and mobilizing supplies in the Honam region. Moscow's Eastern School, where Bang Ho-san studied, mainly taught military administration. Military government refers to a method in which the military rules after occupying an area militarily before a civilian government is established.

    Professor Emeritus Heo Nam-seong said, “Bang Ho-san was an expert in civil affairs and military administration. Bang Ho-san was tasked with conquering Honam, which was rich in commercial products. “He would have played a role in requisitioning from the Honam region and providing food to the troops,” he said. “Bang Ho-san would have wasted a week doing civil affairs in the Honam region. He explained, “At that time, he eradicated right-wingers in the Honam region and executed many soldiers and police officers.”

    He continued, “According to the records, it is said that Bang Ho-san recruited many doctors from the occupied areas. By the end of August, one-third of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on the Nakdong River defense line were conscripts from South Korea,” he said. “If Bang Ho-san had advanced straight away without doing civil affairs, Masan would have been easily captured.”

    Bang Ho-san was recognized for his exploits and was given the title of hero after the war. Afterwards, he served as commander of the 5th Corps of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and president of the Army University, but it is presumed that he was purged for his involvement in the ‘August Sect Incident’, which was an anti-government activity in 1959.


    ※References = Bae Dae-gyun (2020) ‘Masan Defense Battle’, Bae Dae-gyun (2021) ‘True Story of Changnyeong Defense Battle’, Ha Sun-bok (2022) ‘Reexamination of the Battle of the Western Masan Area of ​​the Nakdong River Defense Line’

    ※This article received support from the Gyeongsangnam-do Local Newspaper Development Support Project Grant.


    Interview with Professor Emeritus Heo Nam-seong of National Defense University

    “We need to reexamine General Michelis’ role as a fire brigade along the Nakdong River defense line.”


    Heo Nam-seong, professor emeritus at National Defense University.
    Heo Nam-seong, professor emeritus at National Defense University.

    -Currently, the names of the battles are different, such as the Masan Defense Battle and the Battle of the Western Masan Area. How do you think it should be organized?

    △Although the name is different, I think the name Masan Defense Battle is the most appropriate. The Masan defense battle can include Seobuksan Mountain, Oknyeobong Peak, and the Haman area. Several small battles can be grouped together and explained, and the nature of the battle can be understood at once by hearing the name. I understand that the expression “battle in the western Masan area” is also used. If we use that name, Seobuksan Mountain, where the main hill fighting took place, is ambiguous because it is located close to the north.


    -Is there a person who needs to be reexamined during the Masan Defense Battle?

    △Captain John Hersey Michaelis and the 27th Regiment of the 25th US Division. When Captain My Kelis first came to Korea, he was about to be promoted to colonel. He participated in the Masan Defense Battle as the commander of the 27th Regiment. The 27th Regiment served as the ‘fire brigade’ of the Nakdong River defense line, including Masan. On August 2, 1950, it was deployed to Jindong-ri, Masan, then moved back to Changwon, and on the 12th, it was deployed to Yeongsan, Gyeongbuk. Afterwards, as the Dabudong front line became dangerous, it was urgently deployed. Then, on August 25th, they returned to Masan and moved to the Haman front. At the time, General Walker also considered the importance of the 27th Regiment and supported it with two artillery units and a number of vehicles.

    If the 27th Regiment had not been deployed to the Dabu-dong front, the Nakdong River defense line may have been breached. Since then, he has been an important figure in the ROK-US alliance, to the extent that he was appointed as the commander of the US Forces Korea Command Corps. Reexamination is absolutely necessary.


    -As a military history expert, what is the meaning of the Masan Defense Battle?

    △Battle and war must be evaluated differently. Looking at the Masan defense battle alone, no great results were achieved, and the damage to our troops was also significant. However, it was an important and successful battle because it played a role in changing the course of the war. Thanks to the defense of Masan, the area was stabilized, and the powerful 6th Division of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was unable to achieve any significant results after that. The Masan Defense Battle was a decisive battle that protected the Republic of Korea. By blocking Masan, Busan was protected, and the Incheon landing operation was successful, leading to a major counterattack. The Masan defensive battle must be evaluated again.

    Some say that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came down to the south too easily during the Korean War, but this is absolutely not the case. According to released North Korean documents, North Korea at the time planned to occupy the Korean Peninsula in 29 days. However, it took more than 40 days to reach the Nakdong River. This means that the ROK and US forces at the time did a good job of blocking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Additionally, there was never a single incident during the war where the ROK Army surrendered to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as a unit. This is truly a remarkable event in the history of war.


    Reporter Park Jun-hyuk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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