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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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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봄, 이어달리기- 이 림(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 2010-03-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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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이 왔다.

    마른 풀빛 속에 파릇파릇 새 풀빛이 어른거린다. 수선화 꽃봉오리도 부풀었다.

    그저께 외손녀가 어린이집에 입학을 했다. 두 돌 갓 지난 꼬맹이가, 빨간 가방을 매자 갑자기 큰 아이가 된 것처럼 성큼성큼 제 엄마를 앞질러 나가며 외쳤다. “주아 학교 갔다 오쩨! 금방 오쩨!”

    분명하지 않은 발음이었지만 세상을 다 점령할 듯 맑고도 우렁찬 소리였다.

    지난해 여름, 친정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수년간 노환 속에 계셨지만, 여든 너머까지 살면 장수한 게 아니냐며, 당신께서 워낙 담담하게 임종 준비를 하셨기 때문에 우리 자손들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런 분위기가 조문을 왔던 한 문우 작품 속에서 ‘환한 죽음’이라는 말로 나타나기도 했다. 친정, 시댁 네 분의 부모님이 계셨지만 ‘준비된 임종’을 하신 분은 친정아버지 한 분뿐이다.

    시부모님들께서는 자식을 늦게 두어, 자식들이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친정어머니께서는 십 년 가까이 자리보전하시다 아버지께는 물론 우리 자식들에게도 큰 회한의 응어리를 남겨주고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시쳇말로 노부모가 누리는 호사를 어느 정도 누리셨다. 십 년 가까이 혼자 지낸 외로움이야 우리 자식들이 덜어드릴 수 없었지만, 오남매 모두들 가정적, 사회적 기반을 어느 정도 잡은 터라, 각자 자신의 장인장모나 시부모께 미처 못해드린 것들을 대신 아버지께 조금이나마 해드렸다고나 할까. 맛집에 모시고 간다든지, 용돈을 드린다든지 하면 아버지는 민망할 정도로 고마워하셨다. 떠나실 때 더 큰 주머니가 되어 우리에게 되돌려졌지만. 아버지께 가장 어린 자손이 나의 외손녀 주아다.

    임종 전 자리보전하실 때, 누가 불러도 가만히 계시다가도 주아만 얼른거리면 어떻게 알았는지 “주아 왔나” 하고 눈을 번쩍 뜨며 얼굴에 화색을 띠셨다. 돌 넘긴 어린 것이 안마를 한다며 주먹으로 토닥거리고, 뽀뽀하는 걸 보면서, 어쩌면 아버지 몸에 새 피가 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검불과 새싹이 가지는 생명력은 천지 차이라는 걸 아버지 생신날 우리는 이미 알았다. 자리보전하시기 두어 달 전쯤이었다. 까닭없이 자꾸 힘없어 하시던 아버지는 큰 촛불 여덟 개와 작은 촛불 세 개를 당신 힘으로 불어 끄지 못하였다. 끝내는 케이크 판을 입 앞에 바싹 당겨 놓아드려도 작은 촛불 하나 휘청거리게 하지도 못했다.

    망연자실, 모두들 할 말을 잊고 있을 때, 누군가 주아 앞에 케이크 판을 내밀었다. “훅-, 훅-.” 돌 반 된 아이 두어 숨결에 촛불 열한 개는 대번에 전멸했다. 아버지와 주아로 매김되는, 팔십 년 간격을 둔 증조손 간의 평안한 세대교체는 우리 가족사에서도 매우 드물고 귀한 일이다.

    근자에 지구촌에 환란이 많다. 곳곳에 지진이 나고, 폭설과 홍수, 테러나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때 같은 목숨을 잃는다. 교통사고나 불치병으로 졸지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다.

    장수 시대라고는 하지만 자손들 축복 속에서 천명을 다하고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적기에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요즘 젊은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봄이 왔다. 폭설 속에 가까스로 왔다.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봄이 다 왔거니 했다. 그런데 그끄저께부터 실실 내리던 비가 그저께 밤에는 때아닌 폭설로 변해 도시를 덮어 버렸다. 그렇게 심한 봄 폭설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상 고온 속을 헤매며 봄이 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겨울 가고 봄이 오고, 그리하여 마른 풀숲 속에 새싹이 돋는 당연한 계절의 이치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당연함으로 여겨지지 않는 요즈음이다.

    우리 주아가 할머니가 된 팔십 년 뒤 봄에도, 그 다음 다음 세대 봄에도 ‘마른 풀숲 속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마땅한 계절의 이어달리기가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삼라만상의 아름다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길 빈다.

    이 림(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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