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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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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섬과 동백꽃- 조화진(소설가)

  • 기사입력 : 2010-03-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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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섬에 내렸을 때는 오전의 해가 하늘 한가운데를 통과하기 직전의 시간이었다. 정오가 지나면 해의 기울기는 이내 시작되어 조금씩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해 마침내는 선홍빛 바닷속으로 풍덩 빠질 것이다.

    해빙기의 지심도는 고요하고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땅에는 큼직큼직한 동백꽃이 저벅저벅한 발자국 소리처럼 뚝뚝 떨어져 있었다. 아직 3월이었다.

    어렸을 적 고향집 뒷동산엔 숲의 반이 동백나무였다. 고목의 동백나무는 하늘을 가려 어두웠다. 군데군데 잔설이 쌓인 자리에는 노란 꽃술이 달린 붉은 꽃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어린 나는 붉은 주단 같은 큰 꽃숭어리를 주워 실로 꿰어 목걸이를 하고 놀았다. 매서운 겨울이지만 고운 손이 언지도 몰랐다. 또래 아이들도 주로 그렇게 놀았다.

    여름이 올 때쯤이면 반질반질 윤기 나는 동백 열매를 주워 할머니께 달려갔다. 할머니는 열매를 모아두었다가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바르고 쪽을 찌셨다.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섬에 서서 섬들을 본다. 바다 위에 둥근 구릉 같은 섬들이 떠 있다. 비밀을 간직한 처녀처럼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은둔자처럼 섬들은 비밀스럽다.

    섬은 그리움의 대상이며 미지의 세상이며 또한 막연히 불안이 내재된 장소다. 섬에 가면 속세로부터 자유로워져 마음껏 자아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동시에 결박되어 풀려날 수 없는 동물원의 동물처럼 고립될 것 같다. 자유롭지만 단절되고 싶은 인간의 이중적 마음과 닮았다. 그런 섬의 폐쇄성 때문일까. 섬을 소재로 한 소설과 시 영화는 유독 많다.

    ‘장 그르니에’의 내면적인 문장처럼 섬은 겉모습만 보곤 알 수 없다. 비로소 우리는 섬에 도착하여 둘러보고는 섬의 속살을 알게 될 것이다.

    ‘섬’ 하면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장 그르니에의 섬은 섬의 순례다. 내면적인 섬이다. 자신에게 여행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삶의 지도를 찾아가는 과정을 모호하면서 난해하게 나직나직한 문장으로 들려준다. 한낮의 졸음을 참듯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삶의 탐색인 셈이다.

    섬이 주는 이미지는 밤중에 자다 홀로 깨어있는 고적함이다. ‘섬’이라는 외자는 외로움의 형상이다. 섬은 낭만적이면서 남루하고 아름다우면서 질박하고 고독하면서 억척스러움이 배어 있는 느낌이다. 여기 지심도도 그렇다. 애초에는 몇 안 되는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고달파서 외로워서 주민들은 떠나고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 버린 조그만 섬이 조금은 안쓰러운 지상의 공간이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허나 어쩔 것인가. 현실이 그런 것을.

    어느 날 연인과 섬에 놀러갔는데 풍랑이 일어 뱃길이 끓어지고 섬에 갇히게 된다.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난감하면서도 은근한 낭만이 있는 곳이 섬이다.

    하루나 이틀 혹은 여러 날 동안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충동적으로 떠나기도 하지만 떠나는 사람마다 이유가 있고 다 다르다. 여행이 끝나면 분명히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지쳐 있지만 무언가를 꼭 얻고 돌아온다. 어딘가로 떠날 때의 설레는 기분을 가지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섬에서의 하루는 나 자신을 체크하듯 자기 인식의 좋은 결과물이 되었다고 본다.

    일몰에 빠져 보고 일출을 감상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지만 현실은 불가능했다.

    몇 시간 남짓 섬에 머물다 내려오는데 동백꽃에 눈이 아리다.

    귀향하는 배 난간에 기대서서 섬을 돌아본다. 아껴 먹는 과자처럼 미련이 남는 건 다음을 기약하기 때문에 하는 행복한 마음일 것이다. 한 장의 낡은 스냅사진처럼 하루를 각인한 섬 여행이었다. 그러나 아득히 멀어져 버린 청춘처럼 풍경은 아름다웠다.

    조화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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