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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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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얘들아, 밥 먹어라!- 이병승(시인·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 2010-06-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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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생이던 시절 학선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학선이는 젓가락을 들고 날고뛰며 같은 반 아이들의 도시락을 뺏어 먹었다.

    고기반찬 싸왔다고 팔로 도시락을 가리고 먹는 아이도 있었고, 밥 사이에 계란 프라이를 숨겨와 몰래 먹는 아이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도시락을 나눠 주었다. 아예 뚜껑을 열자마자 학선이부터 불러 먼저 먹이려는 아이도 있었다. 김치 볶음이나 콩나물 멸치 볶음 등 초라하지만 그래서 더욱 풍성한 뷔페 같았다.

    간혹 학선이 도시락을 따로 챙겨오는 아이도 있었지만 학선이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사양했다. 젓가락 하나 들고 교실을 누비면서 먹는 게 훨씬 더 맛있고 양도 많다고 좋아했다.

    학선이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아침이면 전교 교실을 돌며 당시 아이들이 즐겨보던 어린이 신문을 배달했다. 남은 신문은 교문 앞으로 들고 나가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팔았다.

    간혹 점심시간에 돌아다니면서 남의 밥을 빼앗아 먹지 말라며 학선이를 저지하는 선생님도 계셨지만 실은 말만 그랬을 뿐, 실제로 학선이에게 밥을 금지시키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학선이와 즐겁게 밥을 나눠 먹었고 학선이는 그 보답으로 교실의 부서진 책걸상을 고치는 일도 하고 무거운 쓰레기를 비우는 일도 자청해서 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떠도는 사진 한 장을 보고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급식비를 내지 않은 학생은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경고장을 붙여 놓은 것이다. 댓글을 보니 의견이 분분했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급식비를 다른 데 쓰려고 횡령(?)한 아이에게 무상 급식을 주어선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고 어려서부터 바른 경제관념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가난한 아이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넉넉한 집의 아이들까지 무상급식을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저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교육적 목적이든 합리성이든 아이들이 먹을 밥 앞에서만은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좀 어수룩해질 순 없을까?

    그 옛날 점심시간의 추억 속에는 아이들이 스스로 배고픈 아이를 구제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서로가 있는 것으로 서로를 챙겨주는 넉넉함이 있었다. 그런데 삼십 년이나 지난 지금,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진 지금, 오히려 밥을 굶는 아이들이 있고 밥 때문에 상처받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예산편성의 문제나 피치 못할 행정적인 절차상의 사정이 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간혹 주변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분명히 현실적으로는 급식지원 대상자이지만 서류상으로 해당이 되지 않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온전히 어른들에게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들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밥을 굶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를 들어도 변명으로는 너무 구차하다.

    아침 공원에 갔다가 비둘기들이 모이를 쪼는 모습을 보았다. 먹이를 먹을 때마다 비둘기는 한 톨 한 톨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밥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상급식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설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밥 한 그릇 주면서 비둘기처럼 매번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라도 하라는 것일까?

    다행히 이번 선거에서 무상급식 전면 실시를 찬성하는 분들이 많이 당선되었다고 한다. 더 이상 아이들이 밥 앞에서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넉넉히 배려해 주었으면 좋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교 급식뿐만 아니라 집에서조차 밥을 굶는 아이들이 없도록 결식아동들도 챙기고 보살펴주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동네 골목길에서 한참 신나게 뛰어놀다 보면 집집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수야, 영희야! 밥 먹어라!” 지금도 그 소리는 포근하고 따뜻하고 향기롭게 내 마음을 울린다. 밥의 냄새는 그래야 한다. 특히 아이들이 먹을 밥은 더욱 그래야 한다. 어떤 이유로도 밥에는 서글픔의 냄새가 배게 해선 안 된다.

    이병승(시인·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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