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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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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에 오른 월급쟁이 이야기 (2) 그래, 사표를 쓰자

‘꿈이냐 밥이냐…’ 세 살배기 아들과 아내가 어른거렸다

  • 기사입력 : 2016-02-1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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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는 법은 죽는 법에 달려 있다. 죽으면 썩어질 몸, 꿈이라도 꾸어보자 마음먹었다. 입 속으로 오물거리던 꿈을 입 밖으로 토해내니 거짓말같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꾸준한 수영 연습이 제 몫을 했는지 엉거주춤 제대로 걷지 못했던 다리가 회복의 기미를 보인다. 때가 되어 회복된 건지는 알 수 없다. 아주 가끔이지만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이런 우연도 없다. 그 무렵 몸담고 있는 산악회에서 6대륙 최고봉1) 등정을 계획했고 아시아 대륙의 최고봉이자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2) 등반을 결정한다. 모두들 들떴다. 에베레스트는 산을 다니는 사람들의 마지막 꿈이다. 막대한 원정자금과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다 긴다 하는 쟁쟁한 선후배들이 주변 정리에 들어가고 출사표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자신이 원정 적임자라 했고 만나면 에베레스트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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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레스트 등반을 결심하고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사진은 눈 덮인 제주 한라산에서 설벽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

    그런 그들 사이에서 내 안에 타고 있던 불씨를 드러낼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절뚝거리며 다니던 ‘다친 사람’이었다.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뼈가 으스러져도 준봉들을 거느리고 선 지구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의젓함이 잊히지 않는다. 고심 끝에 운명과 맞붙기로 했다. 혹독한 훈련에 돌입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수영을 거르지 않았다. 폐활량을 높여 최저심박수를 50/분 이하로 낮추기 위한 담금질에 들어갔다. 회사를 마치면 곧바로 안민고개까지 10㎞ 오르막을 뛰어 올라갔다. 쉬지 않고 고개를 뛰어 오르면 가슴 깊은 곳에서 피 맛이 올라온다. 심장이 터지며 구토가 나왔다. 주말에는 25㎏ 배낭에 18㎞ 무박 속보, 수영과 마라톤을 지겹도록 반복했다. 누가 시켜서 했다면 단 하루도 하지 못할 일이다.

    훈련이 끝난 다음 날 다시 출근한다.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회사 직원들에게 멀쩡한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직장에서 개인적인 일로 아쉬움과 편의를 토로하며 예외로 치부되기는 싫었다. 그래야 갈 수 있다 생각했다. “에베레스트…” 혼자 중얼댄다. 밤새 걸었던 산들이 회사 모니터에 그대로 박힌다.

    당시, 휴지를 항상 주머니에 휴대하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코피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일이 많았다. 업무보고를 끝까지 마친 후 화장실로 달려가 흐르는 코피를 무표정하게 닦았다. 그래야 비장하다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지긋지긋한 훈련에 자신을 구겨 넣는 냉혈한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 얘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회사의 승인은 큰 숙제였다. 80일이 걸리는 원정기간에 대해 확실하게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분명 허락하지 않을 테고 심각할 경우 퇴사를 종용할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직장을 잃어도 꼭 가야만 하는가? 막막하다. 장고에 들어간다. 이제 막 뛰놀기 시작한 세 살배기 아들이 어른거렸고, 부러진 발목이 아팠고, 할머니의 통곡과 아내의 눈물이 보인다. 이쯤 해서 꿈을 접어야 한다. 내가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2박3일 동안 쉬지 않고 읊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현실에 질식당하던 내 꿈. 파우스트의 고심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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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출산 사자봉 릿지 훈련.


    꿈이냐 밥이냐를 놓고 3일 밤낮을 고민하니 입술이 부르텄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니 이 사태는 큰 산 하나를 등정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인가를 묻고, 확인하는 문제였다. 조용히 주는 거나 받아 먹으며 살 것인지, 먹이를 걷어차고 야생으로 나갈 것인지. 월급쟁이의 남루하고 구멍 난 양말을 버리기로 한다. 말라붙은 삶은 곧 지옥이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아무도 오지 않은 사무실 책상에 정좌하고 사직서를 썼다. 동료들이 출근하기 전, 다 쓴 사직서를 작업복 안주머니에 품었다. 여차하여 얘기가 잘 되지 않을 때 조용히 사직서를 내밀 작정이다. 담당 임원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보내준 편지를 잘 읽었다 했다. 내 뜻이 여전히 유효한가 물었다. 나는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의사를 밝혔다. 3일 뒤, 인사팀에서 내가 제출한 휴직서가 담당 상무의 결재를 통과했다고 전해왔다. 인사팀에서는 자초지종이 듣고 싶다 했고 나는 설명했다. 인사팀은 사례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이미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접수된 휴직서라 절차에 따라 진행됐고 이튿날 대표이사가 최종 서명했다는 말을 들었다. 네팔행 비행기가 뜨기 3일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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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간 산악마라톤 훈련.


    현실과 맞버티며 승리를 예감할 무렵, 아내는 세 살배기 아들의 온몸에 퍼진 아토피와 싸우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울며 보채는 아픈 자식과 씨름하다 지쳐 누운 아내를 본다. 여전히 흥건한 땀이 그 수고를 말해주고 목덜미에 찰싹 붙은 머리카락이 처연했다. 나는 묻고 싶었다. 가족을 떠나 제 발로 사지(死地)로 간다는 것이 어디 용서될 일인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그녀는 늘 나를 지지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아내는 그곳이 사지(死地)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그곳을 결국 가게 되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제 남편이 떠나려는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를 그녀도 참으로 많이 봐왔다. 그녀는 대학 산악부에서 잔뼈 굵었던 사람이고 이 땅의 마루금을 수도 없이 나와 같이 밟았다. 한겨울 설악산에서 한 달을 꽉 채우며 누비고 다녔던 사람이다. 겨울에는 빙벽, 여름에는 암벽을 즐기던 산아가씨였다. 그녀는 내가 떠나는 곳이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내는 나의 꿈을 가만히 들어줬다. 그녀는 말을 아꼈고 대답을 유보했다. 그녀 마음결 안에서 부딪혔을 두려움, 배신감, 아득함, 연민 등을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내의 대답 없는 시간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어느 날, 말끔하게 차려입고 출근길을 나서는 아내를 봤다. 그 간결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왜 나의 자괴로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난데없이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이 몰려왔다. 그런 중에 그녀는 내 눈썹을 살뜰히 다듬어 줬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은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백 마디 말보다 강했다. 세상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며 나는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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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에 제출했던 휴직서.


    그러나 아내는 내 손을 잡았다. “다녀오라.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을 사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에게 좋은 아비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몸에 상처 하나라도 더해서 오는 날엔 너와 이혼이다.” 아내, 내 뒤에 버티고 선 인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든든했다. 녹이 스며드는 삶보다 닳아 없어지는 인생을 선택한 한 인간에 대한 지지였다. 그녀에게, 내 발목은 바스러졌지만 내 척추는 부러지지 않았음을 보이고 싶다. 아내의 허락은 이때까지의 두려움을 자신감으로 전환시키는 각성제가 됐다. 한 겁쟁이가, 들어서도 될까 말까를 망설이다 비로소 생의 두려움 속으로 들어서게 됐다. 아내 덕이다.

    장재용(STX조선해양 혁신추진팀장)

    1) 유럽 Mt. Elbrus 5642m, 아시아 Mt. everest 8848m, 북미 Mt. Mckinley 6194m, 남미 Mt. Aconcagua 6962m, 아프리카 Mt. Kilimanjaro 5895m, 오세아니아 Mt. Kalstents 4889m 이 6대륙에 걸친 최고봉 산들이다. 여기에 남극 Mt. Vinson Massif 4897m를 더하면 7대륙 최고봉이고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 정상은 지구의 3대 극지점이다. 7대륙 최고봉과 3대 극지점에 더해 히말라야 14좌(8000m 이상 높이의 14개 봉우리)까지 이 모든 걸 오른 사람은 산악 그랜드슬램에 등극한다.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사람은 한국인 고 박영석 대장이다.

    2) 에베레스트(Mt. Everest, 8848m), 정확히 말하면 쿰부 히말라야 지역의 에베레스트봉이며 네팔 사람들은 사가르마타(Sagarmate, 세계의 이마), 티벳 사람들은 초모룽마(Chomorungma, 대지의 여신)라 부른다.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19세기, 정확히는 1849년부터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들의 측량 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peak b’로 명명했다가 1850년에 ‘peak h’ 이후 ‘peak 15’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1852년 이 산은 해발 8840m로 측량돼 세계 최고봉임이 증명됐고, 1865년 이 측량 사업에 평생을 바친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 이 산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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