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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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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에 오른 월급쟁이 이야기

무엇이 평범한 직장인을 세계 최고봉으로 이끌었을까
(1) 27조각 난 발목, 히말라야의 꿈은 사라지고

  • 기사입력 : 2016-02-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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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꿈은 있다. 하지만 선뜻 펼치기란 쉽지 않다. 먹고살아야 하고, 가족도 돌봐야 하는 팍팍한 현실에 시달리면서 빛을 점점 잃어간다.

    꿈을 펼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용기다. 평범한 가장이자 직장인인 장재용씨의 히말라야 등정기를 통해 꿈을 펼치는 용기를 엿보고자 한다.

    그의 얘기를 통해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자고 있는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펼치기를 바란다. 장재용씨 이야기는 주 1~2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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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원정 27일 차, 큰 크레바스(빙하와 빙하 사이 시커멓고 까마득한 틈) 위를 알루미늄 사다리로 막 넘어온 직후 눕체봉을 배경으로 후배가 찍어준 사진이다.

    나는 월급쟁이다. 에베레스트, 그곳에 있을 때도 지금도 월급쟁이다. 부러진 발목뼈들은 여전히 붙지 않았고, 두 아이를 둔 왜소한 체격의 아버지고, 밤낮 없이 야근하는 소심한 직장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누가 봐도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뜬금없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구멍 난 양말같이 숨기고 싶은 월급쟁이 남루한 일상이 미웠다. 꿈이냐 밥이냐를 놓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고민했다. 결국, 시키는 일만 하다 인생 끝나겠다 싶어 단 한 번의 일탈을 결심했다. 그때 불 같은 화살이 내 핏줄을 타고 지나가는 당황과 흥분을 느꼈다. 에베레스트, 내 다리를 부러뜨리고 가슴에 사직서를 품게 했던 이야기를 나지막이 풀어본다.

    2005년, 내년 여름 출정을 목표로 히말라야 원정대가 꾸려졌다.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는 만년설 위를 걷고 있었고 정상 등정을 한없이 갈망했다. 입사 6개월 된 사회 초년생으로 직장 안에서 많은 일들과 관계들을 배워나갈 때였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의 허락은 안중에도 없었고 다만 가족들과 여자친구의 허락이 조금 걱정될 뿐이었다. 그마저도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그저 혼자 떠나면 된다 생각했던 천둥벌거숭이였다. 산악회 내에서도 나를 원정대원으로 일찌감치 낙점하고 원정 준비에 돌입했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 믿었고 나는 자신감에 도취돼 원정대 첫 빙벽훈련에 운명처럼 따라 나섰다.

    등반이 시작됐다. 오랜만에 하는 등반 때문인지 빙벽을 오르는 내 몸은 굳어 있었다. 굳은 동작이 먼저인지 떨어져 가는 전완근의 힘과 악력이 먼저인지 알지 못한 채 등반 동작의 메커니즘이 무너져 가는 게 느껴졌다. 빙벽의 7m 지점을 통과할 무렵 몇 번의 스텝을 이어가다 하얀 얼음 벽에서 나는 어이없게 추락, 자유낙하했다. 시간이 꽤 지난 듯한데 나는 아직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질 때 세상은 고요했다. 119구조대에 실려 갈 때 극심한 공포와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고통을 잊으려 왼쪽 발목을 스스로 자르고 싶었다. 구급차에 동승했던 선배님께 소리치며 내 발목을 잘라 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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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캠프(8000m) 고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고비인 제네바스퍼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이다.

    그날 도착한 병원에서 의사는 내 왼쪽 발목을 진단한 후 ‘절단’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의사는 C/T와 MRI 촬영 결과를 살펴봤다 했고 발목 언저리 복숭아뼈가 맥주캔 찌그러지듯 으깨져서 육안으로 확인된 것만 27조각이 났다 했다. 발목을 연결해 주는 정강이뼈 하단, 아킬레스건이 잇고 있는 뼈가 끊어져 살을 뚫고 나왔다 했다. 수술은 불가피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말하며, 멀쩡한 정강이 중단을 쳐서 올린 다음 그 사이 빈 공간에 튀어나온 뼈들을 제자리로 끼워 넣어 부서진 뼈들을 이어 볼 계획이라 했다. 수술이 잘돼도 제대로 걷기는 힘들 거라 했고 잘 안될 경우엔 절단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며 밋밋하게 수술동의서를 내밀었다. 서명을 받은 의사는 곧 수술에 들어갈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며 건조하게 말했다.

    도륙 수준의 6시간 긴 수술이 마무리되고 나는 반병신이 돼 병동으로 내팽개쳐졌다. 다리는 무릎 위까지 붕대로 칭칭 감겼다. 꿈은 날아갔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내 할머니는 나를 부여잡고 통곡했고 먹어야 산다 하시며 집에서 병동으로 매일 먹을 것을 들고 날랐다. 아버지와 형님은 두 번 다시 산에 가면 나머지 발목도 분질러 놓을 거라 엄포를 놓았다. 병문안 오는 친지, 지인들은 이만하길 천만 다행이다 하며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나를 살렸다 했다. 또, 약속이나 한 듯 나에게 다신 산에 가지 않는다는 맹세를 받고 돌아가곤 했다.

    산에 가면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의 꿈을 좇는다는 것은 이리도 허망한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었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세상이었다. 꿈은 팔자 좋은 사람들의 인생놀이에 지나지 않았음을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진작에 주제파악했어야 했다. 그저 애면글면 살아가야 했다. 내 다리에 뼈가 끊어짐과 동시에 나를 우주와 연결시켜 주는 꿈의 네트워크도 끊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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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러진 발목으로 산은커녕 회사도 제대로 다니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동료가 식판에 밥과 반찬을 아침 점심으로 받아줬다. 그들은 멀쩡했으므로 가끔 그들의 말 없는 호의를 동정과 경멸로 오인하기도 했다. 통근버스 계단을 목발로 오르는 순간부터 자리에 앉기까지 빠르지 못한 내 동선과 움직임을 사람들은 고개를 통로로 내고 빤히 지켜봤다. 한 발로 불안하게 뛰어서 회사 팀장님께 다가갔고 불안한 자세로 업무 보고를 했다. 누나의 결혼식에 목발을 짚고 나타나 가족 사진을 찍었다. 친지들은 혀를 찼다. 샤워를 앉아서 해야 했고 발가락 끝만 나와 있는 캐스트(깁스)는 항상 더러웠다. 캐스트 밖으로 노출된 발가락은 추워서 시퍼렇게 변했지만 나는 가만 뒀다. 보기 싫은 목발은 사무실 책상 한쪽에 불행한 나처럼 항상 넘어져 있었다. 나는 절망했다. 사람은 뼈가 부러져 죽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 죽는다. 머리를 쥐어뜯다 밤을 샌 날이 얼마인가. 전두엽이 잘려 나간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다녔다.

    사고가 난 지 3년 후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잊고 있던 꿈을 꺼내봤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지하에 오래 묵혔던 꿈이었다. 아물지 않고 있는 흉터처럼 꿈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찬찬히 꿈이 이뤄진 모습을 상상하며 종이 위에 써 내려갔다. 차마 놓아버릴 수 없는 꿈 하나를 불러내어 곱게 빗질해 줬다.

    자신을 가뒀던 사람은 나였다. 여전히 청춘이었지만 늙은 문장을 가지고 마음의 노회를 부추기고 있었다. 발목은 부러졌지만 여전히 내 등뼈는 곧추세워져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발목은 산산이 조각났으나 내 단단한 허벅지는 아직 부러지지 않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매일을 부러진 발목으로만 살았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아보려 했는가. 나에게 남아 있는 날 중 가장 젊은 날, 바로 오늘, 그것을 시작하리라.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히말라야(himalaya)는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을 뜻하는 hima와 집·거처를 의미하는 alaya의 합성어. 먼 옛날 바다에 떠다니던 인도판 대륙이 아시아판 대륙을 만나며 맞닿은 부분이 융기했고 그 결과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 됐다. 6000~8000m급 고봉들이 동서로 2500㎞ 길이로 버티고 있어 세계의 지붕이라 불린다. 기류조차 이 높은 산맥을 넘지 못하지만 사람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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