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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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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에 오른 월급쟁이 이야기 (4) 유서 쓰듯 써내려 간 엽서들

이제 마지막 오름, 당신과 아들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할 것이다

  • 기사입력 : 2016-02-22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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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급격한 사면에 황량히 뻗은 선명하고 가느다란 길. 저 길을 가면 내 꿈도 나오고 기쁨도 나올 테지만 어쩌면 좌절이나 패배, 슬픔도 나온다. 물끄러미 길을 노려보지만 외려 길은 휘어지고 숨고 나타났다 다시 끊어지며 나를 농락한다. 저 길을 가야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사역동사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힘을 쥐어짜라며 보챈다. 이 끝없는 고도와의 싸움은 내 몸뚱아리 중 어느 하나가 잘리거나 내가 죽어야 결국 끝이 날까. 생각은 두려움을 향해서만 치닫는다. 느닷없이, 내 몸으로부터 나온 내 아들이 나를 보우해 줄 것만 같다.

    고소증은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의욕을 빼앗아갔다. 밥을 먹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고 벌 수십 마리가 내 머리에 들어앉아 돌아다니는 듯했다. 급하게 혈관확장제를 털어 넣는다. 약발이 빨리 듣기를 기도하고 고통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기도했다. 나를 죽이지 마라 기도하고 이겨낼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다. 기도했다. 또 기도했다. 무기력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다.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 모습을 보는 일이 괴로웠다. 해발 3400m, 상보체, 머리채를 쥐어 잡고 급하게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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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중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지만 이곳의 하늘과 밤은 아름답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저녁을 먹기 전 너에게 서둘러 엽서를 쓴다. 오면서 한 아이를 보았다. 너의 모습을 겹쳤다. 하루하루가 만만찮은 고비를 넘기고 있지만 결국 너의 앞에 다시 서겠다는 다짐을 그 아이를 보며 하였다. 위대하고 큰 자연 앞에서 겸손을 배워 신념으로 삼아라. 자신이 미물임을 깨닫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이 큰 우주임을 알아 가라.

    올 때 아팠던 중이염은 곧 나을 것이다. 여기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져 있으나 갑갑하지 않고, 많은 길을 걸어 지쳤지만 피곤하지 않다. 어린이집에서 동무들 괴롭히지 말고 선생님 말씀, 어머니 말씀 새겨 듣거라. 특히 어머니한테는 절대로 개겨서는 안 된다. 외할머니한테는 더더욱 그렇고. 너를 많이 보고 싶다. -everest, 남체에서 아빠가-

    고락셉은 5200m,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가는 마지막 롯지다. 롯지는 2층에 방이 있다. 2층에 올라가는데도 호흡이 가쁘다. 나무 합판으로 이어 붙인 침대에 털썩 앉아 두세 번 심호흡을 한다. 머릿속으로 다음 동작을 그려보고 최소한의 동작을 찾으려 애쓴다. 먼저 천천히 눕자, 누운 채 다리를 들어 침낭으로 밀어 넣자. 생각한 최선의 동작으로 침낭에 누워 다리를 넣었지만 밀려오는 거친 호흡을 감당하기 힘들다.

    천장을 보고 한참 동안 숨을 몰아 쉬었는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침낭을 위로 더 당겨야 한다. 그래야 머리 끝까지 침낭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어나 다시 누울까, 누운 채 엉덩이를 들고 순식간 침낭을 올릴까, 동작 후 호흡의 강도를 상상한다. 곧 다가올 심호흡의 고통에 그 어떤 상상도 물리치고 싶지만 엉덩이를 들어 재빨리 침낭을 끌어 올렸다. 낭패다. 한 번에 침낭을 올리지 못했다. 두 번을 연거푸 올렸더니 숨이 넘어간다. 눈은 멀뚱거리며 천장을 보고 있지만 입은 고함치듯 거친 호흡으로 헐떡인다. 매일 침낭과 싸우며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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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의 길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다 왔다 싶은 곳에서 길이 시작되는, 끝없는 길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Base Camp 입성을 하루 앞두고 여기 마지막 마을, 고락셉에 다다랐다. 오전, 속이 좋지 않아 매우 천천히 걸었다. 지금은 속도 괜찮아졌고 머리도 어지럽지 않다.

    고도 5200m에 무난히 적응하고 있다. 우려했던 심한 고소 증세 없이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다. 모두 그대의 덕이다.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이 땅에서 너를 언젠가 볼 수 있다는 기대 하나로 매일을 이겨내고 있다. 외국인들은 여기까지 가족과 함께 트레킹을 하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곧 아들과 너를 만나면 같이 하겠다 다짐하며 그 모습 기억해 둔다.

    너와 함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기 설산과 깎아지른 준봉의 파노라마를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만 진경요산을 너 없이 바라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림의 떡이요 앙코 없는 찐빵이요 그야말로 너 없는 나다. 15년여간 이렇게 멀리 떨어져 너를 그리워해본 적이 있을까.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다. -everest, 가장 높은 마을 고락셉에서-

    수면 중에는 호흡이 잦아든다. 호흡을 맘껏 하지 못하면 고소증세에 시달린다. 수면 중에는 심호흡을 할 수 없다. 에베레스트에서는 최대한 수면 시간을 줄여야 한다.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새벽, 잠이 쏟아지는 중에 방광을 터뜨리며 나오려는 오줌을 견딜 수 없었다. 좀체 오지 않는 잠을 어렵사리 잤는데 저 추운 밖에서 오줌을 누고 온다면 분명 잠이 깰 테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텐트 밖으로 나가 근심을 해결했다. 수면모드를 유지하려고 실눈을 하고 오줌을 누는데 추워서 오금이 저리는 중에 이놈 오줌이 그칠 생각을 안 한다. 예상치 못한 런타임에 당황했다. 살을 찢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고 다시 텐트로 들어갈 때, 흠칫 밤하늘을 보았다.

    순간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하늘 전체에 빼곡하게 수놓은 별이 보름의 달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밤하늘에 빈틈없이 박힌 별들이 나를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려다보는 장면에 나는 내 눈조차 의심했다. 숭고하다는 표현이 맞을까. 하늘에 걸려있는 별의 노다지를 보고 나는 입을 벌린 채 한참 동안 남대문을 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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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원정대 및 원주민들의 각종 물자는 히말라야 야크가 주로 운반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Base Camp의 하루는 귀를 찢는 눈사태 소리와 하늘을 가르는 산사태 소리로 시작된다. 너를 두고 온 지 보름, 하루하루 낯설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낯선 하루들이 모여 더 큰 그리움을 보탤 것이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지만 오늘 유난히 너를 보고 싶었다. 엽서에 이름이라도 적어 그 마음을 달래본다.

    고작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너와 함께한 십오 년이 사무쳐 온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 중에서 가장 잘한 것이며 가장 탁월했던 결정은 너와 결혼한 것이다. 평생을 걸어 그대를 사랑할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유난히 그립다. -everest, 베이스캠프에서. Icefall, 쏟아지는 별…그대 -

    야크가 지나면 그 무리가 모두 지날 때까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같이 움직이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험도 있겠거니와 기다리고 멈추는 것이 고소증세에 가장 훌륭한 약이 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엔 저 옆을 비집고 가볼까도 했다. 그러나 잠시라도 그런 마음을 먹은 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진 건 나 말고 모든 것들이 멈추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다.

    히말라야에서 바삐 움직이는 일은 죄악이다. 느린 시간이 지배하는 여기서는 바쁜 게 비윤리적이다. 빠른 시간에 익숙하고 멈춘 시간이 용납될 수 없는 내 관성이 무서웠다. 야크를 보며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까발려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한 아이의 아비라는 생각이 내 몸을 야크의 뿔처럼 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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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에게 보낸 엽서, 주로 베이스캠프에서 휴식을 취할 때 썼고 하산하는 타국 원정대에 부탁해서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몸이 좋지 않아 입원했다 들었다. 옆에서 돌보지 못하는 아비의 마음이 아프다. 너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이 꼭 멀리 떠난 아비의 책임 같아, 여기 everest base Camp에서 불안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하루 빨리 나아지기를 기도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이곳에 오른다고 해서 특별한 보상이 없을 뿐더러 주위 사람의 희생은 크기만 하다. 하지만 극한의 육체적 고통과 자기 내면의 안이와의 싸움은 성숙한 인간을 만들어 낸다. 자랑스런 아비의 모습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상에 다가서는 발걸음마다 너의 밝은 얼굴을 겹친다.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너도 아픔을 이겨내고 밝은 아이가 되어라. 아비는 너를 사랑한다. -everest에서, 어린이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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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에게 보낸 엽서, 혹시 나쁜 일이 생기면 아비의 존재를 보여 주기 위한 글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힘든 모습이 눈에 선한데 옆에 있어주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너의 모습이 매일 잊히지 않는다. 세현이가 아파 입원했고 뉴스에서 날아드는 사고 소식에 떠난 남편 원망이 클 것이라 짐작한다.

    너를 만나기 위해 반드시 무탈하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오르려 한다. 너의 소중함이 빛나는 것은 너를 사랑하기 위한 내 마음의 불씨가 불타려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Base Camp에서 머리를 감았고 밀린 빨래를 했다. 하고 보니 방정이었다. 말끔해진 내 모습과 깨끗해진 옷가지들이 왜 처연했는지 모른다.

    Camp3 고소적응과 마지막 오름이 남아 있다. 너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랑한다. -everest에서, 마지막 등반을 앞두고-

    장재용(STX조선해양 혁신추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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