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7일 (화)
전체메뉴

에베레스트에 오른 월급쟁이 이야기 (3) 죽음의 지대

높아질수록, 마음은 오르길 원했고 몸은 내려가길 바랐다

  • 기사입력 : 2016-02-15 22:00:00
  •   
  • 어제까지는 월급쟁이였고 오늘, 목줄이 풀린 ‘내’가 됐다. 지구별 용마루에 오르기를 학수고대했던 시간들이 마치 지금을 위해 존재한 것 같다. 지난 수많은 ‘오늘’들이 장대 끝에 깃발을 올리며 내 승리를 승인한다. 정상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려면 어떤가, 내 승리는 산을 올라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오른 것이나 진배없다.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게 내가 오른 산이다. 그것이 내 목적이었다. 벼랑 끝까지 몰고 간 내 고민이 나를 키웠고, 허벅지가 터지는 훈련으로부터 배웠고, 일상을 끊어내는 단절로 정신적 근육을 굴곡지게 했으니 그것으로 됐다.
    메인이미지
    고도가 높을수록 죽음의 확률도 높아진다. 어디서든 버릇처럼 엎드리며 기도를 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가는 상행 카라반이 시작됐다. 남체(3200m, 마지막 마을)를 넘어 텡보체(4100m,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원이 있는 곳)로 간다. 메마른 공기로 인해 입안은 항상 갈라지는 소리를 내는데 청포도 사탕을 입에 물고 이쪽 뺨에서 저쪽 뺨으로 굴려 보냈다. 사탕이 굴러간 궤적을 따라 없던 침이 생겨나고, 사라질 것 같던 인적 없는 오솔길이 입안에 침이 생기듯 열린다. 햇살이 내 척추에 내린다. 고소증세를 이겨내고 맑아진 머리는 내가 살아온 중에 가장 쾌청했다. 고소에 적응되자 죽을 것 같은 두통은 사라졌다. 머리를 두 쪽 내고 꺼낸 뇌를 바람에 씻어 날리니 풍욕된 뇌는 제 혼자 구만리 장천을 걷는다. 사무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일 외에는 어떤 미래도 어떤 장소도 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소심했던 내가 히말라야를 걷고 있다. 그 눈부신 아침을 맞이했고 햇살 아래 기뻐하며 그지 없이 걷고 있다. 경이로운 일이다. 사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없다. 어떤 일이든 일이란 항상 밀려 있는 법이다. 밀린 일들을 밀어내고 산으로 갔더니 산은 왜 이제 왔냐는 듯 나를 바라본다. ‘밉다는 걸 게다.’
    메인이미지
    네팔 입국 후 공항에서 셀파들과 만나 대원들과 찍은 사진.

    그러나 낯선 이방인을 맞는 에베레스트의 인사는 살갑지 않았다. 베이스캠프(5400m)로 입성하던 날 처음으로 우리를 반긴 건 숨막히는 호흡과 구토였다. 시시때때로 내리꽂는 눈사태의 엄청난 굉음에 몸을 움찔거리며 깜짝깜짝 놀랐다. 내 몸에 두려움이 충혈된다. 낮아지는 산소포화도와 요동치는 맥박은 여기가 신의 영역임을 알려줬다. 에베레스트는 ‘여기는 너와 같은 미물이 머물 곳이 아니다’를 자신의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고 희박한 산소로 내 숨통을 조여오며 없는 식욕까지 모두 앗아갔다. 견디기 힘든 두통에 두개골을 부수어 뇌를 꺼내고 싶었다. 두려움에 떨수록 두려움은 커졌고 두려움이 다른 두려움을 낳았다. 마음은 오르기를 원했고 몸은 내려가기를 바랐다. 나는 살고 싶었지만 내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해야 했다. 탱탱했던 피부가 늘어져 갔고 윤기 빠진 허벅지 살이 말라빠진 껍데기로 변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다. 산소 없는 8000m 지대에서 4일을 보냈다. 산소통을 메고 살았지만 무생물 지대에 산소통 할아버지를 멘다 한들 지상의 기압과 같을까. 먹는 족족 토해내야 했다. 배가 고팠지만 먹을 수 없었다. 오늘은 자야지 하며 낮에 터벅터벅 걷는다. 잠이 와서 미칠 것 같지만 텐트를 찢는 바람과 혹한에 잠을 잘 수 없다. 그곳은 고함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하는 역설의 현장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내 민낯을 봤다. 이곳은 생명을 아우르는 땅이 아니었다.
    메인이미지
    히말라야에서 돌아가신 두 분과 함께 숙소에서 찍었던 사진. 왼쪽 첫 번째 고 박행수 대원, 왼쪽 세 번째 고 윤치원 대원.

    등반이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4월 어느 날, 내가 있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시신 한 구가 빙하를 뚫고 떠올랐다. 주위 사람들은 최소 10년 전 아이스폴(Ice fall) 지대에서 추락사한 사람으로 추정했다. 오랜 시간 동안 빙하가 융기와 침식을 거듭하면서 시신과 함께 움직였다 했다. 빙하가 움직이는 동안 사지(四肢)는 찢겨 나갔고 몸통만 이제서야 지상으로 떠올랐다고 했다. 셀파들은 으레 있는 일인 듯 간단하게 염을 마쳤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팔과 다리는 수색하기를 포기하고 시신을 아랫마을 롯지로 운구했다. 지켜보던 나는 엄숙했고 두려웠다. 나는 빙하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 움직이는 빙하가 죽은 사람을 싣고 다니고 있었다. 나도 그 위에 실려 있다.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내 실체는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의 터럭 끝에 매달린 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다.
    메인이미지
    라마제는 신께 감히 들어가겠다고 고하는 티벳 제사이다. 라마제를 지내지 않으면 셀파들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날 저녁 히말라야의 마나슬루(8163m, 세계 8위봉, 히말라야 8000m 이상 14개 봉우리 중 8번째 봉우리)로부터 비보가 날아왔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우리는 한국의 다른 팀과 함께 이틀 동안 같은 숙소에 묵었다. 그들은 마나슬루로 출정했고 등정 후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며 나란히 원정길에 올랐었다. 그렇게 그 팀과 헤어지고 한 달 뒤, 나는 그 팀의 전도유망한 산악인 2명을 히말라야 신께서 데려갔다는 소식을 시퍼렇게 날 선 바람과 같이 들었다. 그 소식은 히말라야 준봉의 옆구리를 휙휙 돌아가는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와서는 내 광대뼈 끝을 ‘칙’ 찢어버리고 박혔다. 우리는 등반을 중단했다. 참담한 소식에 한동안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창원 진해 출신의 산악인이다. 고(故) 윤치원, 까만 얼굴에 무뚝뚝했던 사나이, 웃을 때 아이 같던 눈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는 탈진한 후배를 끝까지 끌어안으며 지켰고 결국 산이 됐다. 고 박행수, 인사성만큼이나 밝은 표정,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 한 달 뒤 이 자리에서 꼭 다시 만나 삼겹살 먹자 하던 그의 붉은 두 입술이 잊히지 않는다. 이듬해 시신으로 발견된 박행수 대원의 손에는 장갑 대신 양말이 꼭 끼워져 있었다 한다. 그날 그들의 상황을 짐작하려 눈을 감았다. 화이트아웃에서 절규하는 그들의 3D 환영이 온 방을 감싸다 이내 환한 웃음으로 바뀐다. 더 이상 가누기도 힘든 두꺼운 옷은 입지 마시라. 걷기조차 어려운 무거운 신발과 배낭을 이젠 내려놓으시라. 자신의 천복(天福)을 좇아 흰 산에서 영원히 사는 법을 택한 두 악우(岳友 : 산악 친구)님의 명복을 빈다. 영면하시라.
    메인이미지
    베이스캠프 전경. 뒤편에 보이는 산에서 특히 산사태가 많이 난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남은 나, 그들의 죽음을 살아 있는 나와 연결시키며 나를 살려 달라 했고 지켜주시라 빌었다.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끝나지 않았고 제 자신을 위한 비열한 기도로 이어지고 있었다. 텐트 옆 까마귀를 보며 생각했다. 오를 수 있을까. 베이스캠프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돌들이 부러웠다. 나는 두려웠다.

    틈 날 때 끄적이던 엽서는 이제부터 유서가 됐다.
     
    장재용(STX조선해양 혁신추진팀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