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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12)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 구형왕릉(仇衡王陵)

“돌무덤 속에서라도 가야 백성을 지키겠노라”
신라 세력 커지며 잦은 침략
가락국 건국 490년 만에 멸망

  • 기사입력 : 2017-09-25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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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찌 흙속에 묻힐 수 있으랴

    ‘나라를 보전하지 못한 내가 어찌 흙 속에 묻힐 수 있으랴. 차라리 돌 속에 들어가서라도 가야백성을 지키겠노라.’ 신라에 나라를 넘겨준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은 별궁인 산청의 지리산 수정궁(水晶宮)에서 나라 잃은 설움에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라를 넘겨줬기 때문에 양왕(讓王)이라 일컫고 스스로 심산유곡에 묻히기를 원했던 구형왕은 자신의 한(恨)을 외진 산골에 돌무덤으로 남긴 것이다. 6가야의 맹주로서 고구려 신라 백제와 함께 4국시대를 열어가며 찬란한 가야문화를 꽃피웠던 가락국은 주변 열강들의 세력다툼 속에 국운을 잃고 그만 신라에 나라를 내주고 말았다. 수로왕이 나라를 세운지 490년 만의 일이다.

    그후 가야제국(伽倻諸國)은 차례로 신라에 병합돼 서기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520년의 가야역사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만다. 가락국의 마지막왕 제10대 구형왕은 즉위한지 12년만인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의 침공을 받게되자 친히 장졸을 이끌고 낙동강 연안에 진을 치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피아간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구형왕은 사직(社稷)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을 전화(戰禍)에서 구해 생명을 보전케 하는 것이 군왕의 도리라는 생각에 스스로 나라를 신라에 양도해 결과적으로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통일하는 기초를 놓아줬다.

    밀양에서 양국(讓國)의 절차를 마친 구형왕은 왕자와 왕비 그리고 신하들을 거느리고 지품천현(知品川懸:지금의 산청) 지리산으로 떠날 때 신라는 구형왕을 상등으로 대우하고 가락국 전체를 식읍으로 삼게 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산청 왕산의 수정궁에 은거하다 5년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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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돌로 쌓아 만든 구형왕릉.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다.



    ▲나라를 넘겨줬다 해서 양왕(讓王)

    김해 수로왕릉 숭선전(崇善殿)의 신도비문 (神道碑文)에는 ‘신라가 강성하여 자주 침노하였으므로 구형왕이 백성이 많이 죽는 것과 또한 자신의 세대에 나라가 망했다는 소리를 남길 수 없다하여 아우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자, 비(妃), 빈(嬪)을 거느리고 방장산(方丈山:지리산)의 태자궁으로 들어갔다’라고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홍의영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는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산과 절이 있고 그 위쪽에 왕대(王臺)가 있으며 아래쪽에 왕릉이 있으므로 왕산(王山)이라 하고 능묘를 수호하는 절을 왕산사(王山寺)라 한다. 이 절은 왕의 수정궁(水晶宮)이다. 왕은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인데 신라에게 멸망하자 이곳으로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사지냈다’고 했다.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되기 한 해 전인 구형왕 11년(서기 531, 신라 법흥왕 18) 겨울, 밤마다 연자루(燕子樓)라는 누각에서 큰 소리가 나 도성인 금관성을 진동시키자 왕이 누(樓)를 헐도록 명하였다. 시조대왕의 옥첩(玉牒:왕실의 계보)에 ‘연자는 임자(壬子)이니 나라를 신라왕에게 전하여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명에 따라 구형왕은 왕위를 물려주고 산청 방장산에 들어가 버렸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입으로 전해져 내려올 뿐 기록이 없어 사실로 증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구형왕릉이 사적으로까지 지정돼 있지만 행정관청에서 발행하는 안내책자에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져 온다는 말인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으로 표기할 정도다.

    가락국의 마지막왕 구형왕의 능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에 자리잡고 있다. 지리산 상봉에서 불과 50리 정도의 거리에 있는 왕산(王山) 아래 능소(陵所)라고 불리는 곳이다. 지리산 깊은 계곡 마천에서 흘러 내려온 임천(臨川) 옆 덕양전(德讓殿)이 구형왕릉 입구다. 이곳에서 산 쪽으로 1km쯤 올라가면 구형왕릉이 나온다.

    ▲유언 따라 돌무덤

    왕릉의 형태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잡석 (雜石)으로 쌓아 방형(方形)의 단(段)을 이루고 있다. 둘레가 100m, 전체 높이 20m, 7층으로 쌓은 돌계단의 높이는 7.15m이다.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다는 점에선 고구려의 장군총과 같은 유형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 위에다 동그란 능분을 만든 것이 일반 봉토분(封土墳)과는 다르다. 무덤 앞의 비석, 들짐승 등 석물(石物)은 모두 후대에 만들어 세운 것이다.

    아래쪽서 다섯째 계단 중앙에는 가로 세로 50㎝ 크기의 네모난 구멍이 있다.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인근 마을 사람들은 혼유혈(魂留穴)이라 부른다. 영혼이 머무는 장소란 뜻이다. 구형왕릉은 흔히 명당이라 일컫는, 뒤쪽으로 주산(主山)을 의지하고 앞이 확 틔었다던가 양옆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도 갖추어지지 않은 그저 평범한 산골짜기에 있다. 양옆의 보잘 것 없는 능선이 비좁은 계곡을 그리며 흘러가는 한쪽 기슭에 왕릉이 자리한 것이다.

    가락국 왕의 무덤을 어찌하여 첩첩산중 아래 이렇게 비좁은 계곡에다 모셨을까. 그리고 나라를 내주고 만년을 이곳 지리산에 의지한 구형왕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능 아래쪽 1㎞ 지점에는 구형왕과 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인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여기서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 문중은 구형왕과 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망향화를 드린다. 향화는 한때 전화로 중단되었다가 1798년 왕릉아래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린 뒤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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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형왕과 왕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



    ▲김유신 장군 어릴 때 무술연마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金庾信) 장군은 구형왕의 증손자다. 시조왕 수로의 12세손으로 김유신이 태어난 것은 신라 진평왕 17년인 서기 595년이다. 그는 소년시절 이곳 능소에서 무술을 연마했다. 능소는 왕릉에서 300m 아래쪽이라고 알려져 있다.

    왕릉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길가에는 신라태대각간순충장렬흥무왕김유신사대비(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金庾信射臺碑)라고 새긴 기념비가 있다.

    왕릉 입구에서 가파른 산길을 따라 40여분을 올라가면 넓은 평지가 나타나는데 입구에 ‘가락국 태조왕 유지’라 새겨진 바위가 눈길을 끈다. 정상을 향해 조금더 오르다 보면 언덕바지에 구형왕이 군사를 지휘했다는 ‘명령대’란 큰바위가 나오고 왕대가 있었다는 평지에 올라서면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생초면 등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왕산 아랫쪽 큰 돌무더기가 바로 구형왕릉이다.

    구형왕릉은 막연히 신비의 무덤 혹은 미지의 무덤으로만 알려져 오다가 여러 사료들에 의해 ‘구형왕릉’으로 추정돼 1968년 사적 제21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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