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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⑥ 충의의 고장 의령

장날 시작된 마세운동, 일주일간 의령 전역에 번지다
1919년 3월 14일 의령읍 장날 첫 만세운동
15일 부림면 신반장날서도 3차례나 시위

  • 기사입력 : 2019-03-0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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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령군 부림면을 찾은 날은 마침 신반장날이었다. 장터는 북적였다. 100년 전인 기미년(1919년) 3월 15일도 신반장날이었다.

    그해 신반장은 인파로 가득 찼다. 하루 전인 3월 14일 의령읍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정학은 신반으로 와 정주성에게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정주성은 최한규, 장용환, 황상환과 협의해 15일 신반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정오가 되자 장 복판에서 재빨리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모인 이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10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기억은 오롯이 남아 있다. 북적이던 장터 뒤쪽으로 야트막한 야산. 정심정 궁도장이 있는 신반공원에 ‘3·1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광복 40년을 맞은 1985년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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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군 부림면 3·1운동기념비./성승건 기자/

    의령은 ‘의병’의 고장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규합하고 왜군을 무찔렀다.

    충의의 고장 의령에서는 독립만세운동 역시 거셌다. 일본군 조선헌병대 사령부가 작성한 ‘1919년 조선소요사건상황’ 기록이다.

    ‘3월 14일 의령읍내에게 공립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군중 2000명이 경찰서로 밀려오기를 하루에 세 번이나 했고, 다음 날 15일에도 읍내에서 3차례 시위가 있었고, 부림면 신반에서도 시위운동이 있었다. 3월 16일은 읍내와 지정면 봉곡리에서, 3월 17일은 칠곡면에서 시위운동이 있어서 소요는 4개소에서 10회가 있었다.’

    1936년 경상남도경찰부가 기록한 ‘고등경찰관계적록 1919~1935’ 등에 따르면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서울로부터 지급 전보가 날아왔다. 누이동생이 급한 병으로 입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급전을 받은 구여순은 3월 3일 서울에 도착했다. 사실은 오빠에게 서울 독립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한 전보였다. 구여순은 함께 간 사촌의 양말 속에 독립선언서를 감춰 돌아왔고, 동지를 규합해 3월 14일 의령읍 장날에 만세운동을 펼쳤다. 독립선언서는 용덕면사무소 서기들의 도움을 받아 등사했다. 3월 15일에는 주동 인물들이 검거되자 다시 수백의 군중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등 의기가 꺾이지 않았다.

    의령읍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들은 15일 부림면 신반, 16일에는 지정면 봉곡장터, 17일에는 칠곡면으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만세운동은 인근으로 계속 퍼져나갔다. 18일 창녕군 남지리와 진주읍, 합천군 삼가리에서도 만세운동의 불길은 계속됐다. 현재 화정면인 상정면 덕교리에서도 20일에 만세운동이 펼쳐지는 등 의령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의령에서 벌어진 3·1독립만세운동에는 지역유지와 학생, 민중, 면서기와 자본가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했다. 특히 덕교리 만세운동은 순수한 농민들의 자주적 의식 아래 준비되고 단행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반공원 3·1독립운동기념비 옆으로는 6·25 전몰군경을 추모하기 위한 충혼비와 월남참전유공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나라에 어려움이나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의령사람들은 누구보다 앞장서 일어섰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의령의 독립운동가- 백산과 고루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중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안희제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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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 안희제

    백범 김구, 백야 김좌진과 함께 백산 안희제 선생을 삼백이라 불렀다. 김구 주석이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면 김좌진 장군은 무장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갖고 여러 학교를 세웠으며 언론사에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안희제 선생은 부산 동래군과 의령에 학교를 세웠고, 1909년 항일비밀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고 만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했고, 이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키웠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기미육영회를 설립하고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안희제 선생은 1942년 일제에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풀려났지만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에 안희제 선생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입산마을은 안희제 선생 외에도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의열단을 이끌었던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비롯해 의열단에 밀양 출신인사가 많듯이 의령에도 안희제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조선어학회에도 의령 출신이 많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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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 안희제 선생 생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안희제 선생. 그 덕택에 독립운동에 나선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고루 이극로 박사. 영화 ‘말모이’에 등장하는 배우 윤계상이 이극로 박사를 모델로 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극로 박사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정신과 생명이 있을진대 그 민족은 영원불멸할 것이니, 또한 행복은 필연적인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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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루 이극로

    이극로 박사는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일제의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 때 가장 중한 형을 선고받았다. 이극로 박사는 안희제 선생이 설립한 기미육영회를 통해 학업을 이어간 인연이 있다.

    광복회 부산지부가 지난 2013년 공개한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두 사람의 인연을 볼 수 있다. 1934년 서울에서 치러진 백산 안희제 선생의 차남 결혼식 사진이다. 신부는 동아일보를 창간한 하몽 이상협 선생의 막내 처제다. 이날 결혼식에주례를 선 이가 바로 고루 이극로 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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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이극로 선생 생가.

    이극로 박사는 조선어학회를 이끈 인물이었지만 월북인사였기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그의 생가 역시 별다른 표지도 없이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 작은 표지석이 있긴 하지만 정작 마을이나 집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어 찾기가 쉽지 않다.

    차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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